휴가 홀릭인 이탈리아인들이 누리는 가장 긴 휴일은 언제일까. 필자는 성탄절 이브에 막이 오른 휴일이 다음 해 1월 6일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연말 휴가를 꼽겠다. 긴 휴가는 깊은 휴가 블루를 동반하기 마련. 연휴 끝 날인 1월 6일은 주현절로 명백한 휴일임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는 우울에 빠진다. 오죽하면 마녀 탓으로 돌리는 풍습이 생겼을 정도다. 현지인 표현을 그대로 옮기자면 '늙고 추하게 생긴 에피파니아 마녀가 1월 6일 빗자루를 타고 강림해 휴가를 다 쓸어간다'고 한다.
그러나 휴가 블루 유효기간은 잠시. 설탕가루를 폭 뒤집어쓴 프라텔리 튀김과자가 마트나 동내 빵집 진열장을 채울 즈음이면 상황은 돌변한다. 파네토네가 크리스마스 전령사인 것처럼 프리텔리는 사육제가 성 큼 문 앞에 왔음을 알린다.
사육제는 금식과 금욕 생활을 40일 간 견뎌내야 하는 사순절 터널을 앞두고 기름진 음식과 화려한 축제로 정신을 무장하는 기간이다. 해마다 날짜는 바뀌지만 보통 주현절 다음 날부터 2월 중순까지다. 기름진 목요일부터 사일 연속 축제 수위가 높아지다가 마지막 날인 기름진 화요일에 절정을 맞는다. 사육제 내내 축제로 채워져 있진 않다. 추측건대 화려한 축제를 준비하라는 배려와 축제일이 남과 겹치는 걸 참지 못하는 이탈리아적 지역 경쟁심이 기간을 늘리지 않았을까 싶다.
사육제의 첫 테이프는 사르데냐 섬이 끊는다. 1월 17일, 사르데냐 중부 내륙, 마모이아다 마을이 축제무대인 마무토네(Mamuthone) 전통 가면 축제다. 가면 축제하면 베네치아를 떠올리고 화려함의 극치나 자유분방함을 떠올리겠지만 마무토네는 기괴하며 비장한 분위기마저 감돈다.
<마무토네 Mamuthone 전통 탈과 종 Wikipedia>
당일날 어깨부터 무릎까지 내려오는 털 옷과 흑가면을 쓴 무리가 터벅터벅 중앙로를 걷는다. 한 발짝 내딛을 때마다 등에 달린 종은 요란한 소리를 낸다. 발을 떼는 동작과 어깨를 세 개 흔드는 타이밍이 맞아야 수 십 개의 종이 일시에 울린다. 마무토네는 원래 가면 이름이자 가면 쓴 자를 뜻하지만, 후에 행렬 자체를 일컫는 단어로 확장했다. 마무토네를 기록한 고증 자료가 발견되지 않아 처음 출현한 시기와 유래는 알려진 바 없다. 다만 원시적인 복장으로 미루어 볼 때 선사시대에 출현했을 거라고 추측할 뿐이다. 마무토네 등에 달린 종들은 소 목에 두른 종과 흡사한 데서 소 숭배 사상에서 기원을 찾는 이도 있다. 또한, 땅을 세게 밟는 동작은 봄에 농부가 땅을 밟는 행위를 떠올리므로 농사 의식이 아니냐는 설도 있다.
마무토네의 기회한 모습에 극적인 효과를 더하는 것은 종이다. 종은 마치 굴비를 짚에 엮어놓듯이 가죽 끈에 매달려 있다. 격렬한 흔들림에도 풀리지 않게 마무토네 흉부에 꽉 묶여있는데, 등 전체를 덮으려면 보토 5~6개의 끈이 필요하다. 마무토네가 걸친 털 옷은 무가공한 양털 소재라 자체가 무거운데 여기에 종 무게까지 보태면 마무토네는 20~30kg 군장을 메고 행군하는 셈이다. 복장이 워낙 세게 몸을 조여와서 행렬이 끝날 때까지 물 한 모금 넘기기 어렵다고 한다.
카노나우에 올인하다-주제페 세디레수 Giuseppe Sedilesu 와이너리
와인 생산자는 주어진 자연환경 내에서 최상의 빈티지를 낳기 위해 혼신을 다한다. 이렇게 탄생한 자신의 분신을 알리기 위해 포도밭이 속한 지역 문화에 연결고리를 만들어 스토리텔링을 엮어낸다. 사르데냐 섬에서 50년째 와인을 가업으로 삼고 있는 주제페 세디레수 와이너리는 다른 품종은 한눈팔지 않고 오직 카노나우 토착품종에만 몰입했다. 이들의 한우물 파기 집념은 마무토네 이미지와 일맥상통했고 가면을 로고로 정하게 된 결정적 이유다. 라벨 디자인도 전통 가면극의 묵직한 분위기를 살려 검은색을 반복적으로 사용했는데 사육제의 분위기를 실감 나게 표현했다.
주제페 세디레수 와인의 95%가 카노나우로 만들어지며 이품종은 사르데냐 섬 전체에서 나올 정도로 섬사람의 소울와인이다. 사르데냐(24,100 km2) 면적은 제주도의 13배(1,846 km2)나 크며 내륙으로 갈수록 섬 자취는 사라지면서 산악지대로 바뀐다. 밭이 속해있는 마모이아다 마을은 겨울에는 눈이 내릴 만큼 춥고 여름은 뜨겁고 건조하다. 토양은 화강암 기반에 땅 밑은 화강암이 풍화되어 부서진 굵은 입자가 메우고 있어 물 빠짐이 신속하며 그 위에 부식토 층이 덮고 있어 카노나우에게 자양분을 제공한다.
주제페 세디레수는 현재 오너의 아버지 성함이자 1970년대에 와인에 뜻을 품고 와이너리를 키운 장본인이다. 그는 소규모 밭을 인수해서 카노나우 밭으로 전환했으며 여기서 나온 와인을 인근 마을에 판매하는 등 사업기반을 다졌다. 2천 년 초엽에 장남 살바토레가 가업을 맡으면서 양조설비 현대화가 이루어졌고 먼 곳에서도 팔 수 있게 병입 와인을 시도했다.
부전자전이랄 했던가.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아들도 시종일관 대형 오크통과 콘크리트 탱크에서 숙성하는 등 전통의 맛에 충실하다. 아들은 최근에 그라나짜(granazza)란 화이트 와인을 제품 라인에 추가하면서 아버지의 단일 와인 고수 방침을 살짝 벗어났다. 그라나짜는 마모이아다와 인근 마을에서만 자라는 토착 화이트다. 주로 카노나우와 블랜딩 하지만 이곳은 그라나짜만 사용해 품종 본연의 풍미를 살렸다.
그라나짜 술레 부체 바르바쟈 IGT GRANAZZA SULLE BUCCE BARBAGIA 빈티지 2019. 알코올 14도
술레 부체 sulle bucce는 껍질과 접촉했다는 뜻이다. 부드럽게 압착한 과일즙과 포도껍질을 6~7일간 접촉시켜 짙은 갈색과 타닌, 바디를 우려낸 레드 같은 화이트다. 오렌지 빛이 영롱한 사르데냐 오렌지 와인이다. 복숭아 잼, 말린 과일의 달콤함과 견과류, 송진, 용담의 쌉싸름한 향이 다채롭게 펼쳐진다. 희미하게 제비꽃 향도 머금고 있다. 타닌 구조가 섬세하고 입안에 남는 떫은맛이 개운함을 준다. 알코올이 14도나 산미가 뛰어나 실제 느낌은 13도나 13.5도에 머문다. 알코올, 산미, 타닌의 균형이 전체적으로 잘 잡혔다.
세디레수 가족의 와인 집념은 포도밭에서도 드러난다. 와인 전제품은 유기농 마크를 획득했으며 포도는 알베렐로 Alberello 방식을 고수한다. 알베렐로는 고대 그리스인이 포도를 가꾸던 방식으로 기후가 흡사한 남이탈리아에 널리 퍼졌다. 키 작은 나무를 뜻하며 분재를 떠올리면 모양 파악이 쉽다. 물론 분재보다는 더 크고(어른 무릎에 닿음) 밑동이 심하게 뒤틀려 있다. 나무 자체가 성장 본능을 억제시켜 그루 당 결과율이 2kg 이하에 하루 물소비량은 일반 나무의 그것을 밑 돈다. 그래서 시칠리아, 풀리아, 사르데냐 등 여름이 무덥고 건조한 곳에서 상등급 포도를 얻으려 할 때 선호도가 높다.
세디레수 와인은 포도 나이와 포도밭 고도에 따라 스타일에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어린 포도에서 수령이 백 년인 포도로 옮겨가면서 향기와 맛이 변주하는 음영의 차이를 보여준다.
사르티우 카노나우 디 사르데냐 Doc Sartiu Cannonau di Sardegna Doc 빈티지 2019. 알코올 13.5도
수령이 최소 3년에서 최대 5년인 포도를 압착한 주스를 알코올 발효를 일으킨 후 콘크리트 탱크로 옮겨 8개월 숙성했다. 와인은 수즙은 편이라 잔에 따른 후 잠시 기다려야 한다. 체리, 후추, 스파이시, 커피 향이 은은하며 부싯돌 잔향이 그윽하다. 산미가 상쾌하며 입안에 감칠맛이 돈다. 타닌이 부드럽고 바디도 적당해 어린 카노나우의 생동감을 만끽할 수 있다.
마무토네 카노나우 디 사르데냐 Doc Mamuthone Cannonau di Sardegna 빈티지 2019. 알코올 14.5도
세디레수의 첫 와인이자 아이콘이다. 수령이 가장 어린것은 15년, 최고는 60살인 카노나우를 혼합해서 압착했다. 주스의 반은 스테인리스 스틸탱크에서, 나머지는 원뿔 형태 오크통에서 알코올 발효했다. 이후 콘크리트 탱크와 대형 오크통에 나누어 각각 24개월 숙성을 했다. 두 와인을 블랜딩 해서 병입 한 와인을 3개월 놔두어 풍미가 골고루 베이게 놔두었다. 짙은 루비색이 영롱하며 체리, 라즈베리, 흑자두, 커피, 정향, 후추 같은 스파이시 계열 향이 감미롭다. 미세한 한약향기는 신선도를 높인다. 잘 다듬어진 타닌의 섬세함이 묻어나며 알코올은 매끄러운 결을 선사한다. 산미가 뛰어나며 과일 아로마가 입안에 또렷이 남는다.
발루 툰두 카노나우 디 사르데냐 Doc 리제르바 Ballu Tundu Cannonau di Sardegna Riserva 빈티지 2015. 알코올 15.5도
고도가 650미터 언덕에서 자란 수령 60~100년인 카노나우의 매력을 한껏 자랑한다. 한 달간 알코올 발효와 침용한 와인을 대형 오크와 시멘트 탱크에 나누어 3년 숙성했다. 숙성이 끝나면 블랜딩 한 와인을 병에 담아서 12개월 안정기간을 가졌다. 잔 중심은 짙은 루비색이 자리 잡고 주위로 옮겨 갈수록 오렌지 빛을 발한다. 말린 무화과, 후추, 스파이시, 체리, 허브향이 사랑스럽다. 잠시 후 블랙베리, 흑자두의 농밀한 향이 흑연, 타바코 잔향과 어우러진다. 와인결이 유려하며 밀도 있는 구조가 돋보인다. 부드럽게 입안 전체를 조여 오는 타닌, 바디가 무겁지 않고 산미도 깔끔해 밸런스가 뛰어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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