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는 포도를 식용과 와인용으로 구분함은 물론 토리노 언덕에서 재배되던 포도품종 종류와 이름 그리고
어원을 기록해놨는데 다음은 몇 가지 예다 - 포도송이가 익으면 땅에 떨어지는 카스카롤로 cascarolo(casca;낙하+ rolo),
다 익으면 황금빛이 나는 에르바루스 erbalus(erba+lus: 빛), 귀족처럼 품격있는 네비올 Nebiol, 익은 포도의 단 냄새가 새들이 쪼아먹지
않고는 못배기는 우체리노 uccellino(uccel:새+ lino), '즙이 풍부함'을 뜻하는 모스토소mostoso(mosto: 즙이풍부한+so),
맛이 좋아 모두 찾아 희귀해진 카리오(cario:귀한+o)
프랑스 품종 nereau의 이탈리아식 표기 네렛토(Neretto), 아로마 품종인
말바시아(Malvasia), 모스카텔로 노스트랄레(Moscatello nostrale), 식용포도인 루리엔가(Luglienga,luglio;7월)와 아오스텐가( Aostenga, agosto;8월)는
두 품종이 완전이 익는7월과 8월 달이 이름이 된 경우이다. 아바나(Avanat)와 카스타냣자(Castagnazza)품종은 노비와인의 주재료였고
파술라 비앙카(passula bianca)로는 단맛의 발포성와인을 만들었다.
크로체의 책이야기는 여기서 접기로 하고 저자로 하여금 와인에 대한 열정을 일깨웠고 반 평생을 포도와 양조연구로 보낸
토리노와 이곳을 300년 이상 지배하던 사보이 왕족에 대해 잠시 알아보겠다. 이탈리아 대부분의 주요와인 산지는 최소 2,000년 이상의
와인용 포도재배와 와인생산역사를 가지는데 고대로마의 대학자이자 관리였던 플리니우스(Gaius Plinius Secundus Major, 기원 후23년 ~ 79년 )가
쓴 “박물지” 에는 초기 토리노 도시 성립과 와인생산 시작시기가 일치됨을 암시하고 있다.
1200년 경 토리노의 지정학적 위치는 그 당시에는 프랑스 사보이주에 백작국을 성립 후 세력을 넓혀가던 사보이가문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해
사보이가의 방계인 아카이아(acaia) 가문이 이곳에 주둔을 결정한다. 아카이아가문의 토리노 진출은 이곳의 와인용 포도재배 이해관계를 증대시켰음은 물론
백성들이 3대 주요식량인 빵,고기, 와인을 언제든지 저렴한 가격에 원하는 양을 살 수 있도록 시장이 강력히 통제되었다.
와인이 주식처럼 여겨졌던 이유는 당시에는 식수의 위생상태가 좋지않아 와인이 물을 대신했는데 물처럼 마시려면 알코올 도수가 낮아야만 했다.
이렇게 민중의 생활과 밀접했던 와인을 제도권내에서 보호하려는 시도는1360년 아마데오6(Amedeo 6)세로 부터였는데 와인과 관련된 사기와 위조행위를
방지하기 위해 중세시대부터 구전되오던 규정을 재 정비해 ‘아마데오6세 법령’을 공포했다.
여기에 적힌 규정 몇가지를 살펴보면 포도밭을 훼손시키는 자에게 손을 짜르는 형벌이 내려졌고 , 8월 중순에서 9월 중순까지는
포도밭 주인을 제외하고는 포 강(江) 건너편의 포도밭에서 숙식하는것을 금지했다. 또한, 포도수확계절인 6월 24일에서 11월 11일 사이에
강 건너 포도밭에 오려면 꼭 다리를 건너도록 의무화했다. 고대그리스인들에 의해 알려진 꿀과 송진을 넣은 와인을 마시던 습관은
1400년 초기 토리노와 그 언덕주변에도 계속되었는데 ‘아마데오6세의 법령’에는 자연적 방법이 아닌 인위적 보당을 한 와인은 불법화 했으므로
이를 어기는 와인제조자에게는 벌금형이 내려졌다.
17세기 포(Po)강 전경
1599년 씌여진 한 기록에 의하면 피에몬테를 다스리던 사보이의 군주 ‘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 Emanuele Filiberto, 1528~1580)’공작이 살던 궁에는
왕실의 와인 공급을 담당하던 ‘소메리에리아(Someglieria)’ 라는 관청이 있었다. 이곳에는 두 명의 소믈리에와 1~2명의 와인 공급담당자,
몇 명의 급사와 나무통 운반인이 고용되어있었다. 이곳의 근무자들이 하던 주요역활은 왕실가족과 귀빈용의 ‘보까와인(vino di bocca’)과
그밖의 궁 인력을 위한‘일반와인(vino del comune)’을 확보하는게 주업무였다고 한다.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 공작 동상
또한,1547년 기록에는 궁에서 일하는 사람 중 124명 만이 두 당 매일1,2리터의 와인을 마실 수 있는 권리가 있음을 전한다.
이러한 대규모 와인소비량을 충당하기 위해 토리노 근교의 낮은 산과 언덕에는 상당한 포도밭과 많은 인력이 와인생산에 종사했음을 알 수 있다.
포 강을 사이에 두고 토리노 시가지가 그 건너편의 언덕을 마주보는 지역은 토리노의 부유층 주택가로 예전에는 귀족이나 중산층들의 여름 별장지로
선호되던 곳이었다. 이곳에 처음 저택을 지었던 인물은 1565년 ‘핀고네(Filiberto Pingone)’라는 Cusy 후작이었는데 페스트가 유럽을 휩쓸 때
토리노 언덕에 마련해 두었던 저택으로 피난해서 전염병의 피해로부터 무사할 수 있었다. 이때부터 토리노의 귀족들과 부자들은 이곳에 토지를 사들여
여름별장을 짓는것이 유행이었는데 핀고네 후작의 경우처럼 전염병으로 부터 피하기보다는 한가한 전원생활을 즐기려 함이였다.
이 별장들은 필요한 식량은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자급자족농장 형태였는데 저택에는 항상 농지가 딸려있었고 여기에 각종 야채와 과실수를 심었고
남향에는 포도밭을 일궜다. 저택 식구들이 마실 와인을 100% 만들 수 있는 자가 양조시설은 기본이고 과잉량은 시장에 내다 팔았다.
그 당시 이런 저택을 이탈리아어로 저택을 뜻하는“빌라(villa)”보다는 포도밭을 뜻하는 "비냐(vigna)"로 불렀다.
비냐 델라 레지나
‘비냐(vigna)’로서 실용성과 심미성을 갖춘 대표적인 예로 1600년대 중반에 지어진 ‘비냐 델라 레지나(Vigna della Regina)’가 있다.
까를로 에마누엘레1세(Carlo Emanuele1, 1562~1630)의 왕자인 마우리지오 추기경이 노후를 보내려고 지은것이다. 건물과 그 주변의 정원은
언덕의 고운 능선을 따라 상승형으로 조성되었고 이곳의 상당한 면적에 프레이사(Freisa)포도를 심었다.
1946년 사보이 왕국의 마지막 왕 ‘움베르토’의 사임과 동시에 포루투갈로의 망명은 그당시에 피에몬테주는 물론 이탈리아 전역에 널려있던
사보이 궁들의 운명처럼 비냐도 오랫동안 버림을 받게되었다. 1995년 유네스코의 지원덕분으로 건물과 정원의 옛 모습을 복원하게 된다.
특히, 정원복원에 심혈을 기울였는데 정원의 서쪽에 위치한 포도밭에는 1600년대식으로 프레이자품종을 심었다. 총 0,74헥타르 밭에
2700여 그루를 심었고 2009년에 첫 수확을 했는데 약 5000여 병에 해당하는 양이였다. 이 귀한 와인을 “여왕의 포도밭”이란 뜻의
“비냐 델라 레지나 Vigna della Regina” 라고 부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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