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 세계는 남성 위주의 사회이며 보수적인 편이다. 물론, 여성이 CEO인 와이너리가 늘어나는 추세이며 와인업계에서 여성의 역할이 늘어나고 있는 건 사실이지만 아직도 곳곳에서 전통관습이 많이 남아있다.
와인은 농업활동이라 건장한 남성이 유리한점이 많지만 한편으로는 전통적인 여성상을 현모양처로 가두었던 역할의 한계는 와인과 여성의 간격을 멀어지게 했다.
일례로 '와인은 여성을 부정하게 만들고 체신을 잃게 한다' 같은 속설을 들 수 있다. 최근까지 월경하는 여자가 양조장에 서성거리면 와인이 식초로 변하다는 미신은 여성의 양조장 접근을 불가능하게 했다. 와인의 대지(에노트리아, Enotria)란 영예를 누릴 정도로 와인 종주국임을 자처하는 이탈리아는 최근에야 여성 소믈리에를 전문 직업으로 받아들였다.
그런 점에서 비춰볼 때 푼셋(Punset) 와이너리의 오너 마리나 마르카리노(Marina Marcarino, 이후 마리나) 전통 여성성을 벗어나려고 사투를 벌였다고 할 수 있겠다. 그녀는 아직 유기농법이 알려지지 않은 때(1980년대) 유기농법을 포도밭에 접목시키려고 최전방에 나섰다. 그 과정에서 여성의 힘으로 직업 장벽의 문턱을 넘을 수 있음을 증명했다.
마리나가 이끄는 푼셋은 네이베 마을(북이탈리아 > 피에몬테 주 > 쿠네오 현)에 소재하며 랑게 지방의 관습에 따라 바르베라, 네비올로, 돌체토 같은 레드와인과 아르네이스 화이트 와인을 만든다.
푼셋 Punset은, 1964년 마리나의 아버지 렌조 마르카리노로 부터 시작한다. 언덕 꼭대기란 뜻을 갖는 구릉지이며 그곳에 양조장을 만든 이유로 와이너리 명칭으로도 불리게 되었다. 푼셋의 현재는 마리나가 가업을 이은 1982년부터 그녀의 끝없는 선택과 챌린지의 결과물이다.
그녀의 첫 도전은 포도밭에서 제초제, 화학약품을 몰아내고 유기농 와이너리를 완성하는데 있었다. 땅의 기능은 다산이며 이를 위해서 화학제품을 뿌리는 것쯤이야 당연하다고 여기는 시절에 그녀의 의도는 혁신은커녕 무분별한 행동으로 비쳤다.
그러나 첫 해에 아무것도 걷어들이지 못하면서 그녀 일생의 첫 수확은 완전 실패였다. 마리나는 실패를 전화위복으로 삼아 꾸준히 자신의 신념을 밀고 나갔다. 최대한 구리와 유황 사용을 줄였고 퇴비를 바이오다이내믹 농법으로 만들어서 땅의 지력을 회복했고 1985년에는 유기농 인증 와이너리 자격을 얻는다.
최근에는 일본의 농업 철학자 마나소부 후쿠오카(Manasobu Fukuoka)가 제창한 '무위 농법'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이제 그녀의 15헥타르의 밭은 자연의 자생력과 치유력을 되찾았고 자체적으로 포도, 식물, 곤충이 공생하는 에코시스템 균형을 이루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모든 양조과정에도 마나소부의 영향을 받아 '포도밭이 하고 싶은 대로 놔둬라 let the vineyard speak"원칙을 적용했다. 배양 효모나 효소를 쓰지 않고 자연 효모가 저절로 포도에 달라 붙어 알코올 발효를 일으키게 놔둔다.
마리나는 포도밭 관리는 자연의 목소리에 따르지만 숙성용기와 방법에서는 매우 전통적인 사고방식을 따른다. 알코올 발효시간과 침용 기간을 길게 하며 특히, 바르바레스코 와인은 슬라보니아산 오크 숙성을 고집하며 신선한 맛을 높이기 위해 바르베라나 돌체토 와인은 시멘트 탱크에서 숙성을 한다.
마리나는 개인행동보다는 함께 하면 더 많은 것을 해낼 수 있다는 유연한 사고를 지녀 적극적으로 와인단체에 참여해오고 있다. 바롤로, 바르바레스코 와인 컨소시엄 협회 임원이자 알베이자 보틀 컨소시엄 회장이기도 하다. 2004년에는 이탈리아 유기농 와이너리 단체인 Consorzio Vintesa Italian Wines 협회를 조직해 이탈리아 유기농 와인을 국내외에 홍보하고 있다.
푼셋 와이너리는 15헥타르 밭에 연 8만 병을 생산하며 모두 유기농 와인이다. 와인 라인업은 바르바레스코 Docg 3종, 바르베라 달바 Doc 1종, 돌체토 달바 수페리오레 Doc(1), Langhe Rosso Doc(1), Langhe Nebbiolo Doc(1), Langhe Bianco Doc(1), Langhe Arneris Doc(1)를 갖추고 있다.
주력 와인인 바르바레스코는 바사린 (Basarin )포도밭과 산 크리스토포로 (San Cristoforo) 포도밭에서 자란 네비올로로 양조했다. 슬라보니아산 오크통에서 최소는 2년, 최대 5년 숙성을 거친다.
최근에 내가 시음했던 랑게 아르네이스 와인을 소개하려고 한다. 아르네이스는 피에몬테 화이트 품종으로 가볍고 신선한 풍미로 많은 와인 팬을 확보하고 있다. 푼셋은 알코올 발효 전에 열매를 살짝 압착한 후 저온침용을 최대 열흘간 놔두어 묵직한 맛과 단단한 구조감을 얻는다.
또한, '포도밭이 하고 싶은 대로 놔둬라' 원칙을 따라 젖산 발효를 일으켜 일부러 산도를 낮추려고 하지 않는다. 즉, 날씨가 포근해서 양조장 온도가 올라가면 젖산 발효를 하고 그렇지 않으면 젖산 발효 없는 아르네이스를 얻게 된다. 7~8개월 정도 탱크에서 효모 숙성을 하면서 와인의 복합미를 높인다.
황금빛에 가까운 노란색 톤을 내며 부싯돌, 그린 티, 복숭아, 헤이즐넛, 아카시아 꿀, 시트론 향기가 매혹적이다. 짭짤함과 산미가 잘 어우러져 있으며 단단하고 치밀한 구조감이 입안을 풍만하게 채운다. 그린티, 헤이즐넛 맛이 입안을 상쾌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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