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바롤로 와인, 역사(part 1, blog.daum.net/baeknanyoung/347 ) 포스팅에 이어집니다.
바롤로 와인이 탄생 후 15년의 시간이 흐른다. 까를로 알베르토 왕의 왕자 빗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이하 에마누엘레 2세 왕)가 왕위를 물려받는다. 사르데냐 왕국은 이탈리아 반도 내 여러 소국가를 통일하고 1861년 이탈리아 왕국을 출범시킨다.
에마누엘레 2세 왕은 시골처녀 벨라 로신과 사랑에 빠져 혼외 자식을 낳는다. 왕비가 사망하자 왕은 벨라 로신을 미라피오레 백작 작위를 수여하고 영지를 하사한다.
1866년, 왕은 세라룬가 달바 마을에 있는 폰타나프레다 포도밭을 사들이는데 이를 '테니멘티 디 바롤로와 폰타나프레다'(Tenimenti di Barolo e Fontanafredda, tenimenti는 토지가 딸린 농장)라 지칭했다. 이 농장은 폰타나프레다 와이너리의 전신이기도 하다.
부모가 사망하자 장남인 에마누엘레 디 미라피오레 백작이 농장을 물려받는다. 백작은 농장을 바롤로 와인의 전초기지로 삼고자 했으며 과감한 지원을 펼친다. 밭을 3백 헥타르로 늘리고 농장에서 일하는 전 직원에게 임금을 지급했다. 그의 결정은 매우 예외였으며 소작인보다는 포도재배와 양조 배경지식이 있는 사람을 고용해서 바롤로 와인 품질을 끌어올리려는 의도였다.
백작의 바롤로와인은 1888년에는 브뤼셀 와인품평회에서 금메달을 , 1892년에는 베를린 와인 품평회에서 금메달을 거둔다. 1887년 백작은 양조시설과 밭을 일반에게 공개해 와이너리 투어의 효시가 되었다.
바롤로 와인과는 직접관련은 없지만 1881년 알바 시에 포도재배와 양조전문학교( Scuola di Viticoltura ed Enologia)가 설립된다. 이 학교는 이탈리아의 저명한 양조교육기관 중 하나이며 많은 고급 인력을 배출했다. 랑게와 바롤로에서 와인 양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이 학교 출신이며 내로라하는 바롤로 와인 생산자의 자녀들이 입학하는 와인 명문 학교다.
19 세기 말~ 20 세기 초
바롤로 지역은 포도밭 소유자와 관리 시스템이 이탈리아 관습과 사뭇 달랐다. 그 당시 이탈리아는 거대한 농장을 지닌 농장주가 다 수의 소작농을 거느리는 게 일반적이었다.
나폴레옹 1세가 사르데냐 왕국을 지배할 때 대대적인 농지개혁이 이루어진다.개혁의 취지는 정부가 교회 소속 농지를 몰수해서 잘게 쪼개 일반인에게 재분배하는 것이었다. 농토의 대부분은 유태인에게 돌라갔으며 이 조처는 가톨릭교도인 이탈리아인들로부터 신성모독이란 지탄을 받았다.
또한, 딸들도 유산 상속 권리가 주어졌고 부모는 땅을 자식 머릿수대로 나누어 물려줬다. 이는, 면적당 땅 주인 수를 기하급수로 늘렸으며 소규모 농토를 지닌 개미 농부층을 두텁게 했다.
기득권층인 귀족세력이 쇠약해 지기 시작했고 알바와 브라(Bra) 시는 중산층(부르주아)이 성장하고 있었다. 중산층은 거대한 자본과 기술을 투자해 양조시설을 세운다. 이들은 일종의 와인 네고시앙으로 포도농가들로부터 포도를 사들어 다량의 와인을 만든 후 판매까지 도맡아 했다.
★ 여기서 잠시 바롤로의 동쪽에서 나오는 바르바레스코 와인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둘 다 네비올로 와인이며 서로 이웃하고 있어 마치 한지붕아래 살다가 분가한 형제 같아서 알아두면 도움이 된다.
옛날부터 두 와인의 구분은 없었다. 그러다 바롤로가 19세기 초반에 양조 혁신을 겪은 뒤 틈이 벌어진다. 바르바레스코 마을은 바롤로 트라이앵글(탄생지)에서 멀었고 그래서 전통적인 양조방식(달콤한 맛이 나는 약발포성 와인)을 한참 뒤에나 버렸다.
바롤로 와인에 카브르 백작, 스타리에노 장군, 팔렛티 후작 부부가 있었다면 바르바레스코에는 도미지오 카바짜(Domizio Cavazza)가 있었다. 카바짜는 똑같은 네비올로지만 바르바레스코 미세기후와 만날 때 일어나는 미묘한 변화를 알리고 싶었다.
1894년 9명의 생산자를 연합해 Cantine Sociali del Barbaresco 와이너리를 설립하며 바롤로 와인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한다. 이 해를 바르바레스코 와인 원년으로 삼았으며 후에 '프로두토리 델 바르바레스코(Produttori del Barbaresco) 와이너리'의 전신이된다.
바르바레스코 와인은 속도는 느렸지만 바롤로 와인이 거쳐온 길을 밟으면서 품질 개선을 이루고 와인의 여왕이란 별명을 얻게 된다.
1908~1945년
1908년. 바롤로와 바르바레스코 생산자들은 와인 홍보와 판매 목적으로 콜라보의 필요성을 느낀다. 또한, 원산지 인증 도입을 모색한다.
1927년. 공식적으로 두 와인의 생산지역과 경계 지역이 정해진다.
1934년. 바롤로와 바르바레스코 와인 보호 컨소시엄이 결성된다.
이 시기에 1,2 차 세계대전이 발발했고 그 타격으로 중산층이 경영하던 다 수의 와이너리가 파산했다. 이때 농부나 소규모 농장주들은 포도밭을 사들인다. 하지만 네고시앙 및 와인 중개인 와이너리, 대형 농업협동 조합식 와이너리는 농부들로부터 포도를 싸게 구입해 저가 와인을 생산하는 양 위주의 전략으로 명맥을 유지한다.
파시스트 정권은 식량생산 우선 정책을 강요했고 결과적으로 포도밭은 곡물 밭으로 바뀌었다. 포도밭 면적은 대폭 줄고 포도는 과일 공급 목적으로 대량 생산되었다.
전후~ 1980년대
전후에 산업붐이 일면서 농부들은 농토를 버리고 공장에 취직한다. 일부는 공장에서 일하면서 부업으로 포도밭을 보존하려고 했다.
1960년대. 부씨아(Bussia)나 로케 디카스틸리오네(Rocche di Castiglione) 포도밭을 소유한 소수의 와이너리들은 한 밭에서만 추수한 네비올로로 싱글빈야드 바롤로를 선보인다.
1966년. 바롤로와 바르바레스코 와인은 Doc등급에 지정된다.
1980년. 둘 다 Docg 등급에 지정된다.
1967년. 바르바레스코 와인의 도약기. 안젤로 가야는 Sori San Lorenzo 싱글 빈야드, 브루노 자코사는 Asili 싱글 빈야드 바르바레스코를 출시한다.
1985년. 레나토 랏티 와이너리의 창업주 레나토 랏티는 바롤로 11군데 마을의 미세기후와 토양을 면밀히 조사한 후 바롤로 크뤼 지도(Carta Generale dei migliori vigneti del Barolo)를 완성한다. 그의 지도는 매우 정밀하고 과학적이라 2000년 크뤼 지도 제작 전문가인 알레산드로 마스나게티가 제작했고 이탈리아 와인 규정에서 승인한 MEGA 지도와 거의 일치했다.
※MEGA : MEnzioni Geografiche Aggiuntivo(지명 덧붙임)의 줄임말로 크뤼나 싱글빈야드를 의미한다.
※ 레나토 랏티 와이너리 포스팅 blog.daum.net/baeknanyoung/301?category=4325
1986~1990년대
네고시앙이나 와인 중개인은 바롤로 지역에서 사라지다시피 했고 소수의 협동조합 와이너리도 명맥만 유지했다. 오래전부터 포도밭을 소유하고 있었으나 수확한 포도를 와이너리에 납품하던 농부들은 독립해서 와인 생산자로 거듭난다.
소규모 생산자들은 자본은 부족했으나 가족끼리 힘을 모아 품질위주의 바롤로 생산에 집중한다. 이로 인해 패밀리형 와이너리 붐이 일었고 이들은 바롤로 와인의 전성기를 가져온 주역들이다.
1986년에 이탈리아 와인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메탄올 스캔들(가짜 와인 스캔들)은 이탈리아 와인산업의 구태의연한 방식에 치명타를 가한다. 이 스캔들을 계기로 이탈리아 와인계는 재편이 이루어지고 품질이 전반적으로 향상된다.
한편, 바롤로 와인은 와인 평가지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으면서 국제 와인시장에서 명성을 차곡차곡 쌓아간다. 또한, 세대교체가 이루어져 국제적인 마인드를 갖춘 젊은 생산자들은 새 양조기술과 첨단 양조 기기, 바리크를 사용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1993년 3월 5일, 바롤로 보이스가 결성했고 그들은 바롤로 와인 전통 프레임에 의문을 제기했다. 의문의 골자는 바롤로 와인에 접근을 어렵게 만드는 타닌을 다루는 방식에 대한 차이다. 그들은 소형 바리크 오크(225리터)에 네비올로를 숙성하면 타닌의 떫은 맛이 빠르게 줄어들고 오크에서 우러나오는 풍부한 향은 어린 와인임에도 불구하고 마시기 훨씬 편하다고 믿었다.
150년 전에 선구자들이 실험을 거듭한 끝에 매뉴얼로 자리 잡은 전통 보테(대형 슬라보니아산 오크통)와인 숙성 방식을 따르던 전통방식 생산자들과 충돌을 일으킨다. 이는 바롤로 보이스를 주축으로 하는 현대주의자와 전통방식을 옹호하는 전통주의자의 대립을 부축였다. 양측의 불화는 와인 애호가 사이에 바롤로 관심을 증폭시켰고 서로 경쟁하면서 바롤로 품질을 더한층 높이는 메리트로 작용한다.
2000년~2014년
밀레니엄 시대에 들어서면서 두 파의 소모적인 대립은 줄어들고 포도품질 개선과 개별 포도밭 테루아를 표현하는 쪽으로 에너지가 집중된다.
2천 년 초부터 작황이 좋은 해가 연이어 나와 바롤로 와인은 최상의 빈티지를 기록한다. 생산자들은 바롤로 포도밭을 구획별로 세분화하고 싱글 빈야드 바롤로의 비중을 높여갔다. 일반 바롤로보다 포도밭 명칭이 붙은 바롤로가 고가로 팔려나가는 등 프랑스 보르고뇨의 크뤼 밭 시스템을 도입하자는 목소리가 커져갔다.
한편, 바롤로 와인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포도밭 면적 대비 네비올로 밭 비율이 압도적으로 늘어난다. 한때 대중적 인기를 누리던 돌체토 와인은 가장 타격을 많이 받았는데 현재 돌체토 면적이 급속도로 줄어들고 있다. 일부 바롤로 생산자들은 포도밭에서 자취를 감춘 토착품종 즉, 나스체타, 펠라베르가, 로세제 비앙코 등을 복원해 상품화하는 데 성공한다.
2007년. 바르바레스코 MEGA 공식 출범. 4군데 마을 66개 크뤼 밭
2010년. 바롤로 MEGA 공식 출범. 11군데 마을 170개 크뤼 밭
▶바롤로 와인은 네비올로 묘목 식재에 매우 엄격한 규율을 적용하는데 다음의 지형에는 네비올로를 심을 수 없다. 북서와 북동쪽 경사면, 평지와 투습력이 낮은 토양, 포도밭 해발고도가 170~540미터 외부
2014년 바롤로와 바르바레스코 지역은 유네스코 자연유산에 등재된다.
바롤로 와인 - 테루아, 지형 (0) | 2020.12.12 |
---|---|
바롤로 와인-테루아, 기후 (0) | 2020.12.11 |
바롤로 와인, 역사(part 1) (0) | 2020.12.07 |
패밀리형 와이너리, 뱁빼 마리노 방문기 (0) | 2020.11.05 |
바롤로 생산자들만의 화이트 와인 (0) | 2020.10.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