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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안발마 식구들의 신정맞이

와인별곡

by 이탈리아 와인로드 2019. 1. 7. 1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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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안발마 레지던스 이웃들은 올 해로 열 번째로 겨울을 맞지만 이런 겨울은 처음이다. 한겨울임에도 불구하고 체레솔레 호수의 물결이 바람에 이리저리 밀려 출렁대고 있기 때문이다.


피안발마 레지던스는 체레솔레 레알레 마을의 가장 낮은 곳에 지어진 빌라촌이다. 이마을은 북서 이탈리아의 피에몬테주와 남동 프랑스의 경계를 이루는 알프스 연봉 중 비교적 산세가 험하지 않은 그란파라디소 국립공원의 북쪽 비탈에 들어선 촌락이다.


마을명인 체레솔레 레알레는 호수에서 빌려온 지명으로 이곳에 상주하는 주민의 대부분은 호숫가 언저리에 지어진 주택에서 살고 있다. 비교적 마을 어귀에 위치한 레지던스는 호수 남쪽과 맞닿아 있는 산등성이 일부를 부동산업자가 구매한 뒤 개발한 빌라촌이다. 복층 빌라 한 채와 단독주택 다섯 채로 되어있는 빌라촌은 설계단계 부터 산의 능선을 따라 집 간격을 서로 엇갈리게 배치를 해 호수의 조망권을 최대한 누릴 수 있게 했다.


레지던스가 굽어 보는 호수 경치는 유명 여행사이트가 추천하는 그란파라디소 국립공원의 뷰포인트에 선정될 만큼 빼어나다. 레지던스 맞은편에는 그란파라디소의 넓은 산자락이 호수 언저리와 닿아 있으며 날씨가 청명한 날에는 호수는 종종 산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최근에 체레솔레 레알레 산골 주민들의 근심거리가 된 호수는 이맘때면 꽁꽁 얼어붙고 그 위를 사람 키를 훌쩍 넘는 눈이 뒤덮고 있어야 했다. 두꺼운 눈 양탄자는 주변의 연봉을 덮어버려 호수와 산의 구분이 모호해지고 온통 설산과 설원뿐인 설국으로 변했어야 마땅하다.


상주인구가 250명 안팎인 체레솔레 레알레의 수입원은 관광객들이 이곳에서 몇 박 며칠을 머무르면서 지출하는 비용이다. 성수기는 짧은 봄이 끝나고 여름이 시작되는 7월 초부터 8월 말과 성탄절에서 주현절로 이어지는 연휴다. 이때 여름 호숫가는 도시에서 도망 온 피서객들의 캠핑차로 장사진을 이루고 겨울 호숫가는 크로스컨트리 스키장이 대신한다.


크로스컨트리 스키장이 스키장 구실을 하려면 몇 차례 내린 눈이 서로의 무게에 눌려 단단해져야 한다. 그위로 눈의 표면을 매끈하게 밀고 평편하게 고르는 스노우 트럭이 지나더라도 차의 무게에 트랙의 한 귀퉁이가 꺼지지 않을 만큼 눈이 내려야 한다. 올 해는 눈이 일찍 왔지만 12월 달에 계속된 포근한 날씨가 이 눈을 다 녹여 버렸다.


산골의 경제활동은 광장에 모여있는 상가에서 이루어진다. 마을 인근에 소재하는 호텔 중에서 가장 많은 룸을 구비하고 있는 모렛티 호텔, 큰 도시에서 잘 나가던 빵집을 홀연히 폐업한 엔리코 부부가 운영하는 유기농 빵집과 산악스포츠와 알프스 자생 동식물 서적을 취급하는 서점이 광장에 들어서 있다. 서점 왼편에는 버스표와 신문을 파는 타바키 가게가 있고 그 옆 공터에는 난방용 장작이 수북이 쌓여 있다. 국립공원 내 산림 채벌권을 갖고 있는 서점 여주인의 아버지가 산에서 채취한 장작의 흥정이 이뤄지는 곳이다.


난방용 메탄가스가 집집마다 들어오지만 이곳 주민들은 장작을 연료로 하는 난로 난방을 선호한다. 일 년 중 두 달 간의 짧은 여름을 제외하고 수시로 기온이 영하에 머무는 산골 날씨라 매일 장작불을 피우는 것은 일일 3식 해결만큼 중요하다. 레지던스 식구들이야 주말이나 휴가 때나 장작을 때우기 때문에 지하창고에 쌓아 둔 장작더미의 둘레는 가늘고 높이는 낮다. 이와는 차이나게 주민들의 집 외벽은 두 겹 세 겹의 장작더미가 둘러싸고 쌓아놓은 더미는 처마 끝에 닿는다.


레지던스 식구들은 서로 닮은 점이 많다. 레지던스에서 차 거리로 가장 먼 곳은 두 시간, 가장 가까운 곳은 반 시간 이면 도달할 수 있는 도시에서 다들 살고 있다. 도시의 소음을 끔직이 싫어하고 직장이 도시가 아니었다면 레지던스를 실거주지로 등록했을 거다. 소음이라고는 관광객이 몰려드는 관광철을 제외하면 바람소리와 가끔 바람에 묻어오는 개 짖는 소리가 전부다.


저렴한 비용으로 전원생활을 누릴 수 있다는 실리도 빼먹을 수 없다. 레지던스 식구들이 모이면 바닷가 빌라에 딸린 주차장 가격이면 이곳 20평 크기의 빌라 한 채를 살 수 있다는 농담을 즐겨한다.


레지던스 식구는 누구나 할 것 없이 이웃의 사생활을 존중하려 애쓴다. 대부분 9년 전에 입주했지만 최근에야 서로의 직업과 나이를 얼추 짐작하게 되었다. 주말이나 휴가에 레지던스에 올라올 때는 산 밑 도시에 근심 보따리를 버려 두고 산에 있는 것만으로도 근심이 저절로 떨어져 나갈 거란 희망을 부풀리면서 온다. 그래서 서로의 방식대로 근심을 해소하는데 방해가 되지 않게 배려를 한다.


이웃들의 배려란 별게 아니고 이웃들의 습관을 반복적으로 보아 오면서 확고하게 된 경험을 따르는 거다.이를테면, 굴뚝에서 연기는 올라오지만 대문이 닫혀 있거나, 인기척은 있지만 창문에 커튼이 드리워져 있으면 혼자 있고 싶다는 메시지다. 오늘은 영 기분이 안 좋다는 뜻 이므로 이럴땐 이웃이 화가 풀릴 때까지 놔두거나 그가 먼저 우리 집 대문을 두드릴 마음이 생길 때까지 모르는 척하는 거다.


햇빛이 찬란하고 푄 바람 폭풍이 산 넘어 걸린 날은 빌라촌은 설렘으로 기대가 찬다. 잘 가꾼 정원에서 일광욕을 즐기는 엔조부부, 호수 쪽에 면한 근사한 베란다에서 루차노 부부는 한가로이 잡지를 읽는다. 이때 농담 걸기를 좋아하는 에찌오가 와인을 들고 나타나면 빌라촌은 한 낮의 정적에서 깨어난다.


그의 싱거운 농담은 대문 안쪽의 그늘 속에 있는 이웃들을 밖으로 끌어내기에 충분하다. 서로 한 마디씩 말을 섞고 보태면 급기야 빌라촌은 시끌벅쩍한 노천 카페 모드로 변한다.


가벼운 담소와 자연스러운 엮임을 즐기는 피안발마 레지던스 식구들이 일 년에 딱 한 번 그 선을 넘은 때가 있다. 매년 12월 31일, 한 해의 마지막 날로 성탄절 전야로 출발한 동절기 연휴가 끝나는 1월 6일 중간에 박힌 날이다. 이즈음되면 무료해진 레지던스 남자들은 마지막 날 밤은 함께 보내자고 메시지를 주고받는다. 보통, 남자들이 날짜와 시간을 정하면 여자들은 각자 가져갈 음식과 누구의 집에서 식사를 할지 정한다.



요리 솜씨 좋은 미렐라는 안티파스토를, 마르첼라는 몇 가지 치즈와 고기 요리를, 파올로는 디저트를, 우리는 파스타로 각자 역할을 분담한다. 빌라촌 식구가 처음 갖은 12월 31일 식사 때 나는 라구 소스에 버무린 타야린 요리했다. 다들 맛있다고 흡족해했고 그후로 파스타는 내가 준비하는 걸로 당연시되었다. 와인은 가져오는 음식과 궁합이 맞을 거라 생각되는 와인을 각자 알아서 가져오기로 했다.


2019년을 5시간 남겨둔 브라이다네 집 거실은 열 명의 이웃들로 붐볐고 음식 냄세로 가득찼다. 이번 저녁식사에는 빌라촌의 유일한 싱글남인 파올로가 여자 친구를 데려 왔다. 건축가인 파올로는 취미로 목공예를 하고 산악 스포츠 광이기도 하다. 평일 귀가 후 장식품을 만들고 주말에는 산에 올라와 스포츠에 전념하는 파올로를 보면서 빌라촌 식구들은 40살이 훌쩍 넘었는데도 혼자인 그를 은근히 걱정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여자친구를 데려 오자 이웃들은 그녀를 식구처럼 맞았다. 그녀는 처음에는 수줍어했지만 곧 오랜 이웃처럼 잘 어울렸다.


올 신정연휴의 가장 큰 대화 주제는 이상난동과 이것이 일으킨 산골의 불경기다. 산책광인 레지던스 식구들은 눈 장비 없이 호수길과 호수변 등산로를 오를 수 있다는 사실이 기쁘지만 않았다. 겨울 성수기 수입으로 여름 성수기까지 버터야하는 주민들의 주름 깊은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크로스컨트리스키 스키어로 붐벼야 할 호숫가는 성탄절날 과식해서 불어난 몸을 산책으로 줄이려는 사람들로 채워졌다. 많이 움직이고 많이 먹어야 산골 살림이 돌아가는데 호수가의 사람들은 지방을 태우는데만 관심있어 보였다.


항상 그렇듯이 인원수의 두 배를 책임지고도 남을 만큼의 음식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피에몬테 출신들이라 고기와  치즈가 주가 되거나 치즈를 넣어 맛을 낸 기름지고 느끼한 음식이 다 수 였다. 다섯 종류의 안티파스토로 시작한 식사는 마지막 안티파스토가 끝나고  파스타가 나올 무렵에 이미 위장의 반이 음식으로 찾다.


이걸 예상한 나는 좀 독특한 요리로 초반전의 묵직함을 덜고 싶었다. 먹음직스럽게 익은 탈리아텔레(생파스타)를 블랙 트러플 소스에 버무려 왔다. 블랙 트러플은 '투버 아에스티붐'의 학명을 갖는 섬머 블랙트러플 이다. 이탈리아 떡갈나무 숲에서 캐낸 섬머 트러플을 얇게 저민 후 엑스트라 버진 올리브유에 마리네이트 한거다.


방금 캐낸 트러플의 향미와는 비교 될 수 없겠지만 생트러플의 3분의 1 가격으로 대리만족을 얻을 수 있다는데 큰 매력이 있다. 데운 빵에 바르거나 생파스타 소스로 쓰면 근사한 요리가 되고 먹는 사람이나 준비한 사람이 부담스럽지 않다. 이웃을 초대해 식당에서 그람 당 가격이 4~5유로 하는 생 트러플을 강판에 갈아 대접하면 이웃은 부담감을 느껴 좋아하지도 않은 트러플을 꾸역꾸역 먹는 흉내를 낼 수도 있을 테니깐...


파스타에서 올라오는 뜨거운 김이 마늘, 송진, 젖은 흙 냄세와 올리브유의 고소한 향을 흘려 보낸다. 랑게의 문턱에 위치한 과레네 마을에서 재배한 네비올로와 바르베라 품종으로 양조한 와인과 함께 들었다. 처음에는 와인의 맛과 향기가 도드라져 파스타의 맛이 파묻히는 느낌이었지만 음식과 와인을 삼킨 후에 향미가 뒤늦게 꽃을 피웠다. 트러플의 마늘, 송진향이 와인의 검붉은 과실 향을 드높이고 신선함을 또렷하게 남겼다. 민트를 씹고 난 후 입안이 청결해지는 그런 느낌이랄까! 누군가 그렇지 않았던가. 트러플은 맛보다 향기로 먹는 음식이라고.


<사진: A.A Ghiomo 의 바르베라 달바 와인은 놀라울 정도의 과실과 꽃 향기를 발산한다. 코르크 마개를 개봉 후 나흘 뒤에 다시 마셨는데도 맛과 향의 강도는 약간 쇠퇴했지만 품종의 개성은 쉽게 분별될 만큼 유지하고 있었다. 2~3일 후면 시들해지는 비슷한 류의 바르베라 와인에 비해 향미의 지속력이 길고 품질도 상당하다.>


한 끼에 파스타 또는 고기 요리 한 접시, 야채, 과일 몇 조각을 담아 내던 위장이 풀코스의 음식을 감당해 낸다는 게 놀라웠다. 다들 알아서 챙겨온 스파클링 와인과 산미가 높은 와인이 위장에 걸린 과부하를 해소해 주었다. 스파클링 와인이 뿜어내는 탄산가스는 음식의 소화를 촉진시켰고 와인의 신맛은 음식에 물려 둔해진 식욕을 매번 깨우는 신통력을 이번에도 부렸다.


좀 미련하게 먹어대는 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한편으로는 가족들만의 단출한 식사였다면 메인 요리를 지나 치즈 플레이트, 디저트까지 도달하기는 결코 쉽지 않았을 거다. 확실한 건 이웃들과의 새해 전야 식사는 과식의 위험은 다분하지만 정신건강 차원에서 봤을 때 더 유익하다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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