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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7개월 동안 나한테 무슨 일이 생긴 걸까요?

와인별곡

by 이탈리아 와인로드 2017. 12. 31.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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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모델링 공사가 대충 끝나서 3개월간의 방랑생활(?)을 접고 새 집에 쳐들어 간 후 나흘이 흘렀다. 천장에 임시로 달아 놓은 전구에서 발하는 희미한 불 빛이 식탁 위에 놓인 파스타에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한켠에는 이삿짐센터 직원들이 놓고 간 이삿짐들이 그대로 쟁여있어 창고인지 집인지 분간이 안된다.


그래도 오늘은 명색이 이사한 후 첫 번째로 맞는 성탄절이 아닌가! 이삿짐들을 뒤져서 용케 흑색 매직펜으로 "FRAGILE, VINO(취급주의,와인)"가 쓰인 박스를 찾았다. 뽑기 하듯 와인 한 병을 골랐는데 마르제미노(marzemino,와인 정보는 포스팅 아래 박스 참조)레드와인이 손에 걸렸다.


몇 달 전 마르제미노를 처음 마셨을 때 여러 과일 향기와 더불어 알듯말듯한 나무향이 나서 나중에 그  향기의 정체를 알아내기로 하고 사뒀던 와인이다. 그동안 와인공부를 게을리해서 그런지 나무 향과 실제의 나무 이름을 연결하는 건 실패했고 오크향만 자꾸 느껴졌다.계피, 가죽 향기가 분수처럼 튀어나오는 와인 한 모금이 목구멍으로 내려가자 알코올의 열기가 식도를 지나 위장까지 번졌다.


이탈리아에서 주거지를 바꾼다는 것은 이탈리아인들 사이에 만연한 관료주의, 무관심, 태만과 정면으로 부딪치면서 그걸 하나씩 해결해 나가는 사투와 같다. 물고기가 도약할 때 사방에 튀는 물방울로 고요한 바다가 출렁거리는 것처럼 잠수해 있던 문제들이 '집 바꾸기'라는 돌팔매질을 당했을 때 사방에서 튀어나온다. 2년 전 집을 팔려고 결정했을때 믿을 수 있는 중개사를 찾는 것에서 사투가 시작됐다. 집을 중개사를 통해 팔 때는 중개사한테 판매독점권을 최소 6개월을 보장해야 한다는 부동산 규정 때문이다.


첫 번째 계약한 중개사는 한 달에 한 번 꼴로 고객을 데려왔고 이들은 하나 같이 구경꾼처럼 집을 빙 둘러보곤 그냥 가벼렸다. 6개월 계약이 만료되는 날까지 총 7명이 집 보러 왔는데 계약이 끝나는 달에는 중개사가 고객을 두 번 데려와 우리의 호감을 사서 계약 연장을 시도하려 했다. 실망한 우리는 이번에는 계약독점이 짧은(3개월) 중개사를 찾았다. 두 번째 계약한 중개사는 집값이 너무 비싸서 문의하는 사람이 없다면서 판매가를 내려야 한다고 설득했으며 방문자 수를 늘리려고 자기 친척과 친구를 방문자 인척 데려오기도 했다. 2년 뒤 새 집주인과 매매 계약을 맺을 때까지 우리는 중개사를 네 번 바꾸었다.


간신히 집을 팔고 새 집을 구했지만 낡은 집이라 리모델링을 해야 했다. 공사기간이 2개월 보름이 걸린다는 말들 듣고 공사 중 먼지와 소음을 피하기 위해 조그만 월세 아파트를 얻었다. 월세집은 피자집 바로 위층에 있었기 때문에 새벽2시까지 침대 밑의 바닥이 흔들릴 정도로 강한 소음이 올라와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새 주거지의 전입신고는 온라인으로 하면 신속하게 처리된다고 해서 온라인으로 접수를 했는데 한 달이 지났는데도 전입신고가 처리되지 않았다. 동사무소에 전화하니깐 한 달 가지고 뭐 그러냐는 말투로 보통 신청 후 한 달 보름이 걸린다고 했다. 정말 한 달 보름 후에 전입신고가 되었다고 이메일로 통보가 왔다.


여기까지는 전채요리. 가스(온수, 취사용) 이전 신고는 한 달이 걸렸다. 가스 이전은 먼저, 가스회사에 사용자 이전 신청(voltura)을 하고 지역담당 기술자와 연락해서 가스계량기 밸브를 묶어 논 고리를 제거하는 절차로 한다. 지역 담당 기술자의 전화는 항상 통화 중이고 간신히 통화가 되었지만 약속 날짜를 잡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가 담당지역을 돌 때는 우리가 선약이 있었고 우리가 괜찮은 시간대에는 그는 다른 지역을 돌았다.


첫 번째 약속은 정문에 달린 벨 옆에 신청자(내 이름) 이름이 없다고 그냥 가버렸다. 일 주일 뒤 벨옆에 내이름을 크게 써놨고 경비아저씨한테 몇 시경에 기술자가 올 테니 수고스럽지만 우리 집 열쇠를 전해달라고 부탁한 후 두 번째 약속을 했다. 약속 날 오후에 경비아저씨한테 전화를 하니깐 약속시간보다 30분 더 기다렸는 데도 개미새끼도 얼씬거리지 않았다고 했다. 가스회사에 전화해서 영문을 알아보니 기술자가 경비실이 어딘지 몰라서 허탕 쳤다고 했다.


내 이름 바로 아래 쓰여 있는 "경비실" 버튼만 누르면 아저씨가 문을 열어 줄텐데 그것도 귀찮아 그냥 가버린 것이다. 세 번째 약속 때는 신랑이 오전 휴무를 내고 약속시간 한 시간 전부터 경비실에서 기다린 다음 기술자를 모시고 집에 가서 밸브를 연결하고 이전 절차를 끝냈다. 첫 번째 약속을 허탕 친 후 한 달 뒤에 새 집 가스관에 드디어 가스가 흘러들어 왔다.


월세방의 계약 기간이 끝나기 몇 일전에 리모델링 담당자로 부터 공사가 보름 정도 연기될 것 같으니 이사날짜를 연기할 수 있냐고 연락이 왔다. 즉시, 이삿짐센터에 연락해서 이삿날을 연기하고 셋방 주인한테 연락했다. 우리 계약 기간이 끝나는 바로 다음날 새 세입자가 들어오기로 돼있다고 했다. 이삿짐센터 창고에 짐을 맡기고 필요한 옷 몇 가지만 챙긴 후 호텔과 시어머님 집을 왔다 갔다 하면서 신세를 졌다.


약속한 보름이 지나 전기 연결 공사, 벽 칠, 타일 공사가 마무리되지 않았지만 이사를 강행하기로 했다. 새 집 주위에 있는 상가에서 흘러나오는 크리스마스 캐럴을 들으면서 우리는 이사를 했다. 침대만 놓을 수 있는 반쪽 방, 변기와 샤워기만 가동되는 화장실, 가스레인지와 개수대만 쓸 수 있는 주방이 우리를 맞았다. 리모델링 회사에서 12월 24일부터 1월 첫째 주 까지는 연말 휴가이기 때문에 공사가 다시 개시되는 날까지 우리가 지내는데 불편함이 없게 임시 대책을 세워놓은 것이다.


며칠 전 아는 지인이 이사했냐고 물어 왔고 이차저차 얘기 했더니 이렇게 답변했다. "오래전 토스카나 책을 읽었던 기억이 나네요. 보일러 고치는 데 2~3년 걸린다고 ㅠㅠ 그런 걸로 스트레스받을 짬밥은 아니시잖아요. ㅎㅎ 편안한 연말 보내세요".


그 말이 맞다. "어떤 이태리 사람은 보일러 한 대를 몇 년 걸려 수리했지만 덩치가 수 십 배 나 더 되는 새 집의 리모델링(비록 반쪽 리모델링이지만)을 세 달 만에 해냈잖아. 연말 휴가 빼고 앞으로 길어봐야 한 달 이면 모두 끝날 텐데 뭐. 그래도 우리는 운이 좋은 편이야. 그리고 인터넷 이전 신청을 11월 초에 했는데 아직도 인터넷 고립 지대야. 인터넷 가입사 직원의 말처럼 기술자가 새 해에는 세상에서 가장 빠른 인터넷을 새 집에 뚝딱 깔아줄 거라 굳게 믿어".


지인의 말을 곱씹으면서 마르제미노 와인을 마셨다. 순간, 식탁 위에서 희뿌연 불 빛을 쏟아내는 전구가 샹들리에처럼 보였고 커튼 없는 창문 앞에 산더미 같이 쌓인 이삿짐 박스는 창 틈을 통해 들어오는 겨울바람을 막아주는 병풍처럼 든든해 보였다.




마르제미노(Marzemino)와인: 레드 품종이며 이품종의 함량이 높은 와인 이름이기도 하다. 트렌티노 알토아디제(Trentino Alto Adige)주의 남부와 베네토주의 트레비소(Treviso)군이 주요 생산지이며 두 곳에서 생산된 와인은 DOC와인 등급에 지정돼있다. 트렌티노 알토아디제에서 생산돼는 와인은 드라이한 맛이 나며, 트레비소군은 좀 더 다양한 양조기법을 사용해서 스푸만테(스파클링 와인)와 프리짠테(약발포성 와인, 버블의 힘과 혀를 쏘는 느낌이 스푸만테보다 순하다) 타입을 선보인다.


트레비소군에서는 잘 익은 마르제미노를 건조하여 "Refrontolo Passito"란 스위트 와인을 만드는데 마르제미노 품종으로 만든 와인 중 최초로 DOCG 등급에 올랐다. 이 스위트 와인은 유명해서 모짜르트가 '돈 조반니의 결혼식'의 대사에("와인을 잔에 부어라! 위대한 마르제미노") 인용할 정도였다.


마그마가 식은 뒤 바람에 의해 풍화된 화산재 토양에서 잘 자란다. 수확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는 와인발효때 양조장에서 나는 냄새, 체리, 비올라, 숲, 각종 베리류 향이 풍부하게 나며 중간 보디감의 묵직함이 입안을 채운다. 화려한 향기에 비해 타닌은 소박할 만큼 차분하다. 와인의 전성기(시음적정시기)는 수확 후 4~5년 이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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