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이 멋진 포도밭을 배경으로 영화를 촬영한 곳을 와인투어 한적이 몇 번 있었다. "토스카나의 태양 Under the Tuscan Sun(2004년 작품)"이나 "줄리엣의 편지 Letters To Juliet (2010년 작품)" 는 베네토와 토스카나의 아름다운 포도밭 경치를 배경으로 스토리가 전개되는 영화로 이탈리아 와인투어를 결정한 와인애호가들에게는 좋은 안내서가 된다.
몇 년 전 시칠리아 섬의 한 와인 산지를 여행할 때 나에게는 반대의 경우가 일어났다. 여행 장소가 한 영화의 촬영지였음을 알게 되었고 그 영화를 본 후 와인만큼 영화에 심취했던 적이 있었다.
종종 자신의 존재감을 세상에 알리려는 듯 하얀 수증기를 토해내는 에트나산이 지척에 있으며 이오니아 해에서 불어오는 습기가 도시의 열기와 섞일 때 나는 비릿한 향이 묘한 정취를 일으키는 시라쿠사(Siracusa)에서 생긴 일이었다.
시라쿠사는 노토와인(Noto DOC), 시라쿠사 모스카토 (Moscato di Siracusa DOC), 에로로( Eloro DOC) 와인이 생산되는 지역에 둘러 싸여 있다. 시라쿠사와 이웃하고 있는 에트나 산 경사지에서 재배된 포도로 만든 에트나 와인(Etna Rosso)과 달리 시라쿠사 와인은 극도의 재배조건을 극복한 영웅의 와인이라 할 수 있다.
에트나산은 활화산에 위치한 포도밭 중 유럽에서는 해발고도가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하며 매년 비가 1500~1600mm 내리지만 현무암이 풍화된 후 퇴적된 화산재 토양으로 이루어져 있어 배수력이 좋고 일교차가 심해 최상의 포도재배 조건을 갖추었다. 반면, 시라쿠사 근교는 이탈리아에서 가장 강수량이 낮은 지역이며(연평균 강수량이 200~300mm 이하) 여름기온이 40도 이상 치솟는 날 수 가 높다. 그러다 보니 바닷바람에 실려오는 습기를 활용하기 쉬운 해안가에 포도밭이 가꾸어져 있으며 양지보다는 음지쪽에 있는 포도밭이 선호되고 있다.
이런 극한의 조건하에 놓여 있더라도 우수한 포도열매를 맺는 또 다른 지혜는 알베렐로(alberello)다. 기원전 8세기경 그리스인이 전달한 재배방식으로 가뭄과 폭염에도 불구하고 포도가 고품질의 열매를 맺을 수 있는 노하우가 여기에 응집되있다.
알베렐로로 재배되는 포도나무의 키는 50cm 정도로 열매만 달린 가지를 모아서 포도나무 주 가지에 묶는다. 약간 거리를 두고 보면 접은 우산처럼 보이는데 묶인 포도가지는 포도송이를 내부로 감싸안게되어 포도 줄기내 물이 증발되는 것을 방지하며 직사광선을 피할 수 있게 한다.
다시 영화 얘기로 돌아가면 시라쿠사에서 촬영한 영화는 말레나(Malena, 2000년 작품, 주제페 토르나토레 감독)며 여주인공의 이름이기도 하다. 이탈리아의 여배우 모니카 벨루치(Monica Belluci)가 36세 때 열연한 영화다.
그녀가 출연한 60여 편의 영화 중 몇 편 밖에 볼기회가 없었지만 연기자로서의 그녀의 카리스마를 알기에는 그 숫자는 충분했다. "패션 오브 더 크라이스트"에서 창녀에서 성녀로 변신하는 막달레나 마리아역, "메트릭스 2 리로디드"에서 페르세포네 역을 맡아 네오(키아누 리브스)를 유혹하는 악마적인 캐릭터를 보였으며 "아스테릭스 미션 클레오파트라"에서는 클레오파트라 역을 맡아 카리스마 넘치는 요부 역을 소화해냈고, 51살의 나이로 본드 걸 역을 맡아 "젊은 여배우 = 본드 걸" 이란 아성을 깼다.
벨루치의 헐리우드 필름의 일부 캐릭터에서 처럼 그녀는 얼굴 표정이나 제스처로 상황을 표현하는데 탁월한 연기자다. 말레나에서 그녀는 이탈리아어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관객이 답답함을 느낄 정도로 무대사로 일관하며 미망인에서 창녀로의 타락 과정을 혼신을 다해 표정연기를 한다.
영화의 주요장면은 시라쿠사의 두오모와 주요 행정부 건물이 들어서 있는 긴 장방형의 오르티자 광장( Isola di Ortigia)에서 촬영되었다. 사춘기에 접어든 13세의 레나토는 27세의 말레나를 보고 첫 눈에 반한다. 결혼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신랑이 전쟁에 지원하는 바람에 말레나는 미망인과 다름없는 생활을 보내고 있다. 머지않아 신랑이 전사했다는 소식이 도착했고 말레나는 일생의 결단을 내린다.
말레나가 주위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눈썹을 내리 깔고 오르티자 광장을 걷는 장면은 영화의 압권이다. 이 장면은 몇 번에 걸쳐 반복되는데 그녀가 이 광장에 등장할 때마다 영화 스토리는 중요한 형국을 맞게 된다.
첫 번째 그녀가 광장에 등장했을 때는 레나토가 그녀를 처음 본 직후다. 청초한 그녀는 땅만 주시한 채 묵묵히 걸어가며 그런 그녀의 육체 위로 여자들의 호기심과 남성들의 육욕의 시선이 떨어진다.
그녀가 두 번째로 광장에 등장한 때는 젊고 아름다운 여자가 혼자 산다는 이유만으로 동네 여자들은 질투심에 사로 잡혀있었고 말레나가 외간 남자를 집에 들인다는 소문이 돌고 있을 때다.
한편, 레나토는 말레나에 대한 사랑을 불태울 수 록 그녀에 대한 집착은 강박증 수준에 달했고 매일 밤 그녀의 집 근처를 서성이면서 그녀의 삶을 엿본다. 레나토는 말레나가 근거 없는 의심을 받고 있지만 어린 자신이 말레나를 도와줄 수 없다는 현실에 광분한다.
말레나는 13세 사춘기 소년의 감성을 잘 표현하고 있다. 레나토가 만나고 보는 여자들은 말레나의 화신처럼 레타토의 눈에 비친다. 십자가 행렬에서 마리아 동상이 말레나로 변신하는가 하면 제인과 타잔, 로마 검투사와 여왕, 안토니오와 클레오파트라 영화를 보면서 자신과 말레나를 주인공과 동일시함으로서 현실에서 이루지 못하는 짝사랑에 대한 대리만족을 얻는다.
말레나는 동네치과 의사의 아내한테 남편과 간통을 저질렀다는 혐의로 고소당하는데 자신의 변호를 위해 법정에 출두하는 날 단호하게 광장을 가로질러 간다. 재판에서 이겼지만 그녀의 변호를 맡았던 변호사가 그녀를 강간하는 바람에 그녀는 정신적으로 타락 상태에 빠진다.
설상가상으로 아버지마저 폭격 맞은 건물의 파편에 묻혀 사망한다. 전시라 직장을 구하기 쉽지 않았던 그녀는 생존을 위해 결단을 내린다. 미모와 젊음밖에 가진 게 없던 말레나는 그녀의 정절을 상징했던 긴 흑발을 자르고 금발로 염색한다. 다음날 그녀의 단호한 생존 의지를 포현하듯 말레나의 시선은 땅이 아니라 주위 사람의 경멸적인 눈빛을 도발적인 시선으로 받아내며 당당하게 걷는다.
영화의 줄거리는 와인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으며 와인 장면은 전무할 정도다. 굳이 들자면 말레나의 큰 집 식탁 한켠에 아무렇게나 놓인 음식 접시와 마시다 만 와인 잔은 그녀의 단절된 외로움을 상징한다 할 수 있다. 자신을 흠모하는 카데이 중위(Cadei)와 저녁 식사할 때 촛불을 반사하고 있는 투명한 와인잔은 그녀앞에 기다리고 있는 기구한 삶을 암시하고 있다.
시칠리아의 주요한 와인의 본산지이며 시라쿠사 주변에 널려있는 포도밭을 기억하는 나로서 영화에 포도밭 장면이 없다는 건 말레나의 극도의 외로움과 고립상태를 보여주려는 감독의 의도가 아닐까 싶다. 와인은 대화와 소통 그리고 내가 누군가와 관계를 맺는 다는 귀속감의 알코올이기 때문이다.
독일군이 시칠리아를 점령했을 때 말레나는 독일군들의 위안부로 생계를 연명하게 된다. 후에 연합군이 이곳을 점령했을 때 동네여자들은 말레나가 독일군에 협조했다고 폭로한 뒤 그녀를 구타하고 머리카락을 자르는 등 갖은 모멸을 가한다. 연합군의 시칠리아 탈환을 기뻐하는 환영인파가 모여있는 그 광장에서 생긴 일이다.
몇 년 후 죽은 줄만 알았던 그녀의 남편이 돌아온다. 그녀와 신혼을 보내던 집은 피난민 수용소로 변했고 말레나의 행방은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말레나가 동네여자들한테 수모를 당한 후 메시나행 열차를 타고 사라진 걸 목격한 레나토는 그녀의 남편에게 그동안 말레나에게 일어났던 일들을 적은 편지를 전달한다. 말레나가 사랑했던 남자는 오직 남편이었다는 사실과 함께...
일 년이 흐른 뒤 오르티자 광장에는 말레나가 다시 등장한다. 옛 집에서 일생을 보내기로 결정한 말레나 부부는 광장의 다른 부부들처럼 다정히 걷는다.
동네 사람들의 호기심에 가득 찬 눈초리는 둘의 어깨에 쏟아지지만 이제는 악의나 질투는 없다. 말레나는 남편과 함께 있고 한 남편의 아내인 말레나는 동네 여자들한테 더 이상 위협적인 존재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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