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드 품종을 화이트 와인 양조방식으로 만든 로제와인은 레드의 정열과 화이트의 냉철함이 공존한다. 레드와인 만드는 데 필수인 해박한 테루아, 영농기술, 양조 지식은 물론 화이트 와인의 핵심인 산도와 천연 아로마 추출에 정통해야 하므로 와인 메이커에게 로제와인은 까다로운 영역이다. 로제와인의 주 특기는 단연 마리화주다.
본 기사를 읽고 있는 독자가 마음 내키는 대로 시킨 음식(디저트 제외)이 로제 와인 맛과 충돌하거나 겉도는 경우는 드물다. 이렇듯 로제는 화이트나 레드가 넘을 수 없는 맛의 장벽을 자유롭게 넘나들고 두 와인의 간극을 채워준다.
로제와인 양조의 꽃은 침용(maceration)이다. 침용은 으깬 껍질과 주스와 접촉하는 시간을 말하며 이 시간의 길고 짧음에 따라 스타일은 큰 가지에서 잔 가지가 뻗어나가 듯 다채롭다. 음악과 잘 결합하는 붙임성, 로맨틱한 핑크빛, 입안에 차오르는 보디도 다 침용하기 나름이다.
이탈리아인은 침용 기간을 그들만의 스타일로 정의한다. 침용 기간을 12시간 이내로 제한하면 나이트 로제(Vino della notte), 24시간 이내면 원 데이 로제(Vino di un giorno)라 한다. 나이트 로제는 막 수확한 포도의 침용을 자정에 시작해서 해가 뜨기 전에 끝낸다. 나이트 로제는 보통 북이탈리아 생산자들이 선호하는 침용법으로 롬바르디아 주와 베네토주의 자연 경계인 가르다 호수 Lago di Garda 주변이 본산지다. 예를 들면 가르다 호수 좌안의 발테네시 끼아렛토(Valtenesi Chiaretto, 그로펠로 품종으로 양조)와 호수 우안의 바르돌리노 끼아렛토(Bardolino Chiaretto, 코르비나와 론디넬라 품종 블랜딩 로제)가 있다. 연분홍빛, 살구빛이 돌며 흰 꽃, 복숭아, 레몬, 자몽계열 향기와 드라이한 맛의 여운이 매력적이다. 눈감고 마시면 가벼운 화이트로 착각될 정도로 섬세하다.
원 데이 로제는 포도의 침용을 12시간 이상 놔두며, 그렇게 얻는 와인은 짙은 장미와 살몬 색을 띠게 된다. 보통 남중부 이탈리아 로제가 여기에 속하며 가볍고 영한 레드와인이 선사하는 보디와 복합향을 지니며 알코올이 14도를 훌쩍 넘는 로제도 상당수다. 체라수올로 다부르조(Cerasuolo d'Abruzzo, 몬테풀차노 품종), 살리체 살렌티노(Salice Salentino, 네그로 아마로 품종), 카스텔 델 몬테(Castel del Monte, 봄비노 네로 품종), 치로(Ciro, 갈리오포 품종)가 해당된다.
필자한테 가장 낭만적인 로제를 고르라면 단연 라크리마(Lacrima)를 꼽겠다. 눈물이란 뜻의 라크리마 로제는 살렌토 지방의 뿌리 깊은 와인 전통으로 양조의 관점에서 본다면 화이트 와인에 가깝다. 수확한 포도송이를 용기에 차곡차곡 쌓아 높으면 무게 압력에 눌려 포도즙이 흘러나온다. 이때 눌린 포도에서 즙이 나오는 모양이 마치 눈에서 눈물 떨어지듯해서 라크리마다. 눈물을 잠시 공기 중에 놔두면 산화가 가볍게 일어나면서 엷은 핑크색을 띠게 되고 이것을 재빨리 발효해서 라크리마 로제를 완성한다.
풀리아주의 살렌토는 부츠 모양의 이탈리아 반도에서 굽 부분에 해당한다. 굽의 서쪽은 이오니아 해, 동쪽은 아드리아 해와 면하고 있는 살렌토는 '반도 안의 작은 반도'란 별명을 얻고 있다. 라크리아 전통을 이어받은 살렌토 지역은 현재 Doc 등급에 지정된 로제 와인만 11종으로 이탈리아 로제와인 집산지다. 대부분의 로제는 네그로아마로 품종으로 만들거나 블랜딩 할 경우도 네그로아마로의 비율이 절반을 넘는다.
네그로 아마로는 네로다볼라 품종과 더불어 덥고 건조한 남이탈리아 기후 적응에 성공해 토착화했다. 두 품종이 아무리 기후와 풍토 적응력이 뛰어나도 바다가 없었다면 현재와 같은 대표성을 얻기는 쉽지 않았을 거다. 사방이 바다로 막힌 시칠리아와 살렌토로 불어오는 해풍은 변덕스럽기 짝이 없지만 해풍이 없었다면 포도는 타거나 말라죽었을 거다.
살렌토 반도는 산이나 언덕 같은 방풍막이 없어 지중해 연안국에서 발생하는 바람이 무사통과한다. 시베리아, 발칸반도에서는 차갑고 건조한 바람이, 중부 아프리카로부터는 덥고 습한 시로코 바람이 수시로 불어온다. 오죽하면 이곳 사람들은 '피부에 스치는 바람결로 그날 날씨를 예측할 수 있다고'한다.
네그로 아마로(Negro Amaro)는 2천5백여 년 전 그리스인들이 남이탈리아에 들여온 품종이다. 워낙 오래된 품종이다 보니 다양한 명칭으로 불려졌다. 어원과 관련해 여러 설이 있으나 가장 유력한 주장은 niuro mavro, 흑색이란 뜻을 지닌 라틴어 niuru와 그리스어 mavro의 결합어다. 아마도 네그로아마로를 레드 와인으로 만난 애호가라면 흑색 반복설에 100% 찬성할 거라 의심치 않는다. 그러나 네그로아마로가 흘린 라크리마와 12시간 내에 침용한 나이트 로제는 우아하고 기품 있다.
<아폴로니오 와이너리의 오너 마씨밀리아노 아폴로니오. 로제와인 만드는 과정 중 가장 어려운 순간은 원하는 색깔을 얻는 침용으로 뽑았다. 그의 시그니처 로제 와인은 알베렐로 수형으로 키운 네그로아마로가 흘린 라크리마 즙을 발효해서 만든다>
귀한 라크리마 로제일수록 알베렐로 alberello로 키운 네그로아마로 포도에서 얻는다. 150년 간 살렌토에서 와인 생산을 해오고 잇는 아폴로니오 가족의 4대손 마씨밀리아노에게 알베렐로에 대해 물었다. "그리스인은 네그로 아마로를 전해주면서 알베렐로 재배법도 알려주었다. 그전에는 포도덩굴은 살아있는 나무를 타고 자랐지만 알베렐로로 바꾸면서 포도는 사과나무나 배나무처럼 버팀목 없이 자라게 되었다. 다 크면 60~80cm 정도이며 그루 당 열매가 두 세 송이밖에 열리지 않아 아로마 농축도가 높다. 키가 난쟁이라 해풍이 강해도 쓰러지거나 부러지지 않으며 건조한 여름에는 물 사용을 스스로 억제한다".
Diciotto Fanali 2016- 아폴로니오 와이너리. 네그로아마로 100%, 알코올 14도
보통 로제는 투명한 병에 병입 하지만 이 와인은 장기숙성에 적당한 레드 와인 병에 담았다. 숙성목적의 로제로 숙성절차와 기간도 숙성용 레드처럼 복잡하고 길다. 라크리마 즙을 아카시아 용기에서 발효 한 다음 같은 용기에서 12개월 숙성, 병숙성 6개월을 거쳤다. 전체적으로 살몬색이 돌지만 노란빛도 스며 나온다. 사과, 장미, 체리, 아몬드, 딸기향이 풍성하다. 경쾌한 산미와 소량이지만 타닌은 미디엄 바디 정도의 구조감을 선사한다. 아몬드의 구수한 풍미가 오랜 여운을 남긴다.
Danza della Contessa 2018- 본세냐 와이너리. 알코올 12.5도
네그로아마로 (80%), 말바시아 네라 블랜딩. 24시간 침용 후 콘크리트 용기에서 발효, 숙성을 거쳤다. 체리, 라즈베리, 시트론 향이 상큼하다. 짠맛과 산미의 밸런스가 뛰어나고 은은한 타닌이 생기를 준다.
Venus 2018-콘티 제카 와이너리, 네그로아마로 80%. 알코올 11.5도
나폴리 출신 귀족 가문으로 1580년에 살렌토에 이주하여 포도농장에 전념해 왔다. 전통과 현대의 기술을 접목해 성공한 와이너리다. 320 헥타르의 포도밭에서 연 2백80만 병 생산한다. 부드럽게 압착한 후 12시간 침용했다. 스테인리스 스틸 용기와 콘크리트 용기에서 숙성했다. 체리, 딸기, 사과, 생강, 타임향이 장밋빛 색깔과 잘 어우러진다. 경쾌한 산미와 소량의 잔당이 혀를 매끄럽게 감싼다.
Negroamaro Rosato 2018- 카리트로 와이너리. 네그로아마로 100%. 라크리마 로제
와인 라벨의 꽃은 와이너리가 소재한 마을 성당의 장미 창을 모티프로 했다. 흐린 살구색, 장미, 체리, 산딸기 향이 수줍게 올라온다. 청량감 있는 산미와 알코올이 적당해 음용성이 뛰어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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