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한 지붕 아래 양조가가 세 명

블로그 운영자가 쓴 와인칼럼

by 이탈리아 와인로드 2023. 5. 29. 19:33

본문

< 가브리엘레와 세레나>

이탈리안 와인메이커 중 다섯 손가락에 뽑힐 만큼 저명한 잔프란코 코르데로 Gianfranco Cordero 양조가가 와이너리를 개업했다고 해서 방문했다. 이미 직업 양조가로 커리어에 정점을 찍고 있던 잔프란코 씨가 프로필에 와이너리 오너를 추가했다는 소식은 랑게지역을 들썩이게 했다. 이것 말고도 양조학을 전공한 두 자녀가 합류했다는 소식이 연이어 나오자 양조학 전공자 오너 시대가 오지 않았냐는 후문이 무성했다. 이 소식을 접했을 때 내 두뇌를 번개처럼 가로지른 생각은 '한 지붕 아래 양조가가 셋이면 서로 자기주장이 옳다며 좌충우돌하지 않을까'였다. 아무리 사리분별을 잘한다고 해도 의견 충돌은 인지상정인데 한 배에 양조가가 세명이나 타고 있으면 산으로 빠지지 않고 제대로 강기슭에 닿을 수 있을지 궁금했다.

 

아들의 이름을 따 가브리엘레 코르데로(Azienda Agricola Gabriele Cordero)라 지은 와이너리는 2018년에 출범했다. 건물과 딸린 포도밭은 로에로 언덕이 겹겹이 둘러싸고 있는 피에몬테주 프리오카Priocca 마을에 소재한다. 로에로 언덕은 알바로 유입하는 타나로 강 북쪽 대지를 굽이치고 있는 구릉지대다. 코르데로의 포도밭은 대물림받은 3.5 헥타르와 개업 전에 인수한 밭까지 합치면 7.5 헥타르다.

 

마침 필자가 정문을 들어섰을 때 안뜰에서는 방금 추수한 바르베라로 가득 채워진 트럭이 선별 컨테이너 벨트에 포도를 흘려보내고 있었다. 선별작업대에서 걸러진 포도는 일단 제경기 안으로 빨려 들어 간 후 반대편 배출구를 통해 열매 자루에서 떨어져 나온 포도알을 내보내고 있었다. 이 알맹이들이 발효와 숙성기간을 마치면 `바르베라 달바 수페리오레 HICA`로 태어날 것이다. 히카 HICA는 코르데로 가족이 시판 중인 와인 중 밀도와 보디가 가장 뛰어나다.

<가브리엘레 코르데로 와이너리 입구>

잔프랑코는 피에몬테 출신 와인메이커라면 거쳐야 하는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 알바 양조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바롤로, 바르바레스코, 바르베라 다스티 지역을 거치면서 피에몬테 레드 와인을 섭렵했다. 1970~1980년 대에는 국제적 인지도가 높은 바롤로 생산자의 수석 와인메이커로 활약했으며 지금도 G.D 바이라, 카스텔로 디 네이베, 콘테르노 판티노, 디에고 콘테르노 와인은 그의 손에서 나온다. 1989년도에는 양조 지원과 품종 연구 전문기관인 Bi.Lab.S.R.L 연구소를 설립했다. 또한 이탈리아 정부 및 유럽 연합이 주관하는 와인 품질 심사 및 인증 서비스와 이탈리아 등급 와인 심사 컨설팅 전문이며 그의 서비스를 받는 회원 와이너리만 170여 군데에 달한다. 또한 DOC와 DOCG 등급 와인 테이스팅 패널 회장을 맡고 있으며 아르네이스와 루케 같은 멸종위기 문턱까지 갔던 품종의 복원 프로젝트에도 참여했다.

 

잠시 앞으로 돌아가 의견 충돌이 발생했을 때 해소하는 방법이 있는지 궁금했다. 가족이지만 넓게 보면 같은 분야에서 일하는 선후배이자 동료라 관점이 다른 데서 오는 의견 대립이 심하다고 딸인 세레나가 토로했다. 수확기에는 서로 신경이 예민해져 수확 날짜나 알코올 발효 중인 와인에 산소 투어시기나 횟수를 결정할 때 의견이 첨예하다. 여러 의견을 수렴해 최종 결정을 내리는 건 아버지 잔프랑코 몫이다.

 

세명의 양조 전문가가 만드는 와인에 거는 외부인의 기대감이 부담스럽지는 않냐고 세레나에게 물었더니 기본에 충실하면 기본이 잡힌 와인이 나오는 게 당연하다는 기본원리로 맞받아 쳐 필자를 뻘쭘하게 했다. 그녀에 따르면 포도 수확시기를 제대로 맞추기만 해도 품질의 70~80 퍼센트를 달성한 거나 마찬가지라고 했다. 이는 포도의 산도가 약간 높다 싶을 때를 수확적기로 잡는 건데 품종마다 변수가 있다. 원래 산도가 높은 바르베라는 산도가 적정기준치를 벗어나기 전에 거둬들여야 한다. 청량감이 생명인 아르네이스는 알코올 도수가 13도를 넘으면 바디가 무거워지고 산도의 신선미가 떨어진다. 그러므로 과육이 당분을 과하게 쌓아 놓기 전에 수확을 마치는 게 포인트다. 알코올 발효는 효모가 산소를 최대로 호흡하는 순간이므로 산소 투여시기와 횟수는 모스토를 시음하면서 결정한다. 알코올 발효가 진행 중인 탱크는 하루에 두 번씩 펌핑오버를 작동시켜 네비올로와 바르베라에 산소를 투여하되 잔당이 완전 소진할 때까지 한다.

 

현재 시중에 선보이고 있는 와인은 네 종류다. 로에로 지역의 토착품종인 네비올로, 아르네이스, 바르베라에 모든 리소스를 집중했다.  유일한 DOCG급의 로에로 네비올로 와인은 현재 오크 숙성 중이며 내년에 첫 빈티지 나올 예정이다. 와인 분위기는 포도 아로마 표현에 충실하다. 핵심적인 향만 발산하며 군더더기가 없는 깔끔한 뉘앙스가  독보적이다. 산미의 청량감이 돋보이며 와인을 혀로 굴리면 온갖 과일의 맛이 재현된다. 세밀한 구조가 떠받치고 있는 질감 또한 완성도를 높인다.

 

로에로 언덕은 모래가 키워드일 정도로 모래 함량이 토질을 결정한다. 밭을 파보면 화석이 자주 별견되는데  3백만 년 전 이곳이 바다였을 때 남겨진 유물이다. 2백만 년 전에는 석회석 기반의 해저가 융기했고 강에 휩쓸려온 점토와 자갈이 차츰 유입되어 밭 두 덩이를 사이에 두고 토질이 달라진다. 코르데로 가족의 바르베라 밭은 점토와 석회석이 주된 토양이며 구조, 보디, 힘이 솟구친다. 반면 네비올로나 아르네이스가 심어진 곳은 모래 비율이 지배적이라 섬세한 아로마와 향기 퍼짐이 은은하다.

 

가브리엘레 코르데로 와인은 현재 아베크 와인이 수입하고 있으며 수입중인 와인은 아래와 같다. 라벨은 잔프란코의 자녀인 가브리엘레와 세레나가 그렸다.

 

                      로에로 아르네이스 DOCG 인나브 Roero Arneis Docg INNAV 2020. 알코올 도수 12.5도

라벨은 가브리엘레가 그린 것으로 수확한 포도를 할아버지와 나르는 추억을 담았다. INNAV 글자를 거울로 비춰보면 반니(Vanni)인데 할아버지의 이름을 거꾸로 쓴 거다. 이른 아침에 수확한 아르네이스를 스테인리스 스틸 탱크 안에 잠시 놔두어 풍미가 골고루 베일 때까지 기다렸다. 엷은 노란빛을 띠며 청사과, 파인애플, 시트론 향이 상큼하다. 이어 카모마일, 흰 들꽃, 말린 토마토 잎 향기가 지중해를 떠올린다. 과일 여운이 입안에 오래도록 머문다. 짭짤한 맛이 혀를 감싸며 산미는 마치 초가을의 새벽 공기처럼 청아하다.

 

랑게 네비올로 푸스끼아 Langhe Nebbiolo Doc Fuschia 2019. 알코올 도수 13.5도

라벨을 장식하는 건물은 산 미켈레 예배당이고 와이너리 입구 오른편에 서있다. 가브리엘레가 유아시절부터 보아 오던 건물을 유머러스하게 표현했다. 푸스끼아는 안개를 뜻하는 피에몬테 방언이다. 수확한 네비올로 10%는 탄산 침용으로 발효했고 나머지는 일반 발효과정을 따랐다. 스테인리스 스틸 탱크에서 풍미가 베이도록 잠시 놔둔 뒤 병입했으며 수령이 7년인 네비올로의 발랄함이 내비친다. 체리, 라즈베리, 장미, 홍차 향이 만발하며 이어지는 향기는 제라늄, 흑연, 커피의 잔향을 머금고 있다. 입을 상쾌하게 적시는 산미와 적당한 타닌이 밸런스를 이룬다. 무엇보다 와인의 밝은 느낌은 한 병을 순식간에 비우게 만든다.

 

바르베라 달바 Barbera d'Alba Docg 2019. 알코올 도수 13.5도

포도밭 좌우로 단풍이든 나무가 서있고 숲 사이를 걸어가는 들짐승의 움직임이 조심스러워 보인다. 흰 여백을 배경으로 펼처져 있는 바르베라 밭의 단순한 붓놀림은 동양화를 떠올리게 한다. 알코올 발효를 끝낸 와인을 스테인리스 스틸 탱크에서 잠시 숙성한 후 병입했다.

 

첫 잔은 알코올 열기가 번지면서 가죽, 후추, 흙 향기가 스며 나온다. 20분 정도 경과하면 허브, 한약, 자두, 커피 향으로 바뀌며 차분한 느낌을 준다. 시간의 경과는 상관없이 부싯돌, 흑연 뉘앙스가 배어있다. 적당히 떫은 타닌은 미디엄 보디와 어우러져 밸런스가 돋보인다. 원숙한 부케를 내면서도 생동감 있는 산미를 겸비하고 있다.

 

바르베라 달바 수페리오레 히카 Barbera D'Alba Superiore Doc HICA 2017

히카는 일명 세레나의 와인이다. 라벨도 그녀가 직접 그렸고 원 안에 새겨진 SER은 그녀 이름의 약자다. 거꾸로 읽은 RES는 스페인어로 존재를 뜻하며 바로 세레나 자신이다. 세레나는 양조학을 마친 후 아르헨티나로 유학을 가서 신세계 와인에 대한 풍부한 경험을 쌓았다. 그녀가 유학시절에 꿈꾸던 와인을 실현한 게 히카다. 달을 배경으로 날갯짓하고 있는 새는 벌새로 포도밭을 수호하는 남미의 신성한 동물로 알려져 있다. 포도밭에 화재가 났을 때 주둥이로 물을 실어와 불을 껐다는 전설의 새다.

 

포도밭 가꾸기부터 병입까지 세레나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이 없다. 포도 수확 일주일 전에 두 박스의 바르베레를 선수확 해 일반 양조과정을 따라 발효시켰다. 이렇게 얻은 와인을 `피에 디 쿠베 Piedi Cuve`라 하며 알코올 발효 때 효모 대신 넣으면 잡균 번식을 막고 알코올 발효 촉진은 물론 발효 중 발생하는 불쾌한 냄세를 미연에 방지한다. 히카는 열매가지에서 분리한 포도알로 채운 발효 탱크 안에 피에 디 쿠베를 넣어 발효를 일으킨다. 발효를 마친 와인은 2~3번 사용한 프렌치 베럴에서 8개월 숙성한다.

 

짙은 잉크빛이 돌며, 타바코, 초콜릿의 묵직한 향기와 흑자두, 블랙베리의 달콤함이 어우러진다. 말린 바이올렛, 귤껍질 말린 향, 견과류 향기도 내비친다. 타닌 결은 매끄러우면서도 팽팽하게 조여진 바이올린 현처럼 혀에 긴장감이 전달된다. 풀보디의 힘이 인상적이며 그 사이를 촘촘히 메우고 있는 구조의 밀집도도 뛰어나다.

 

이 글은 2022년 2월 16일, 와인 메거진 WINEOK에 블로그 운영자가 게재한 글입니다.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