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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몬테인이 들려 주는 바르베라 품종 역사

피에몬테와인

by 이탈리아 와인로드 2018. 3. 12. 2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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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베라 품종은 피에몬테 주가 주요 산지이며 이곳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롬바르디아주, 에밀리아 로마냐주 일부와 캄파냐 주에서 재배되고 있다. 산조베제에 이어 이탈리아에서 두 번째로 많이 재배되는 품종이다.이탈리아 앙케이트 조사 기관이 주기적 음주자와 간헐적 음주자들을 대상으로 선호하는 와인을 질문했는데 양측 모두 바르베라 와인을 선택했다.


이렇듯 이탈리아인들한테 사랑받는 대중적인 바르베라 품종은 이탈리아 대부분의 토착품종처럼 어원과 역사가 분명치 않거나 안개에 싸여 있다. 바르베라는 천여 년 전 부터 피에몬테주에서 재배되었다고 하며  품종명은 현재하고 매우 다른 'Uva Grissa(회색 포도)'로 불리었다.


Uva Grissa란 이름이 처음 등장한 때는 1271년 경 아스티의 재판관을 지냈던 Pier De' Crescenzi가 쓴 'Liber Rualium Commodorum(품종과 양조학 전문서)'에서다. 책에서 Uva Grissa는 포도송이가 길고 짙은 색깔이 나며 포도송이의 껍질이 얇고 포도즙을 많이 포함하고 있다고 적혀 있다. 이 품종명을 바르베라의 어원으로 추정하는 이유는 저자가 부임하던 아스티는 바르베라의 원산지이며 이곳이 주생산지이자 소비시장이란 연역적 추리를 바탕으로 한다.


현재의 '바르베라' 단어가 등장하는 건 1514년이 처음으로 Chierese 마을에 바르베라 포도밭이 존재했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바르베라란 이름이 엄연히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흑색 와인(vinum negrum), 남자아이 (Il Fante), 그 와인(Il Vino)으로 불렀다. 즉, 바르베라는 너무나 친근하고 일상생활의 일부분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품종 이름보다는 일반 명사로 부르기를 선호했다.


1606년 피에몬테에서 출판된 와인서적(Dell' eccellenza e diversita' dei vini che nella montagna di Torino si fanno)에는 바르베라를 "Grisa Maggiore"로 칭했으며 "토리노 근교 언덕에서 소량 재배되고 있으나 네비올로가 더 사랑 받는다"라고 쓰여 있다.


바르베라의 주요 산지인 아스티, 몽페라토 지역에서는 현재와 비슷한 품종으로 만든 와인을 마셨는데 신분에 따라 와인이 달랐다. 귀족들은 달콤한 네비올로, 모스카토 파시토(디저트 와인), 그리뇰리로, 돌체토를 마셨으며 평민이나 농민은 바르베라, 후레이사, 보나르다 와인을 마셨다. 그로바, 네이로네, 발사미나, 게도네 등의 품종으로 만든 와인도 있었으나 이품종들은 이미 멸종했거나 멸종위기에 처해있어 이 와인들은 현재 시중에서 구하기가 힘들다.


1690년대에 들어오면서 바르베라는 아스티 경계를 넘어 몽페라토, 알렛산드리아로 퍼져나갔으며 랑게에도 도입되었는데 네이베(Neive, 현재 바르바레스코 와인 지역에 포함된 마을)에 농장을 소유하고 있던 Pietro Francesco Cotti di Asti 백작은 자기의 영지에 바르베라 첫 묘목을 심었다.


1700년대 피에몬테의 와인거래는 네 군데 주요 시장( Astesana , Monferrato, Alessandrino, Tortonese)에서 이루어졌다. 그중 Alessandrino와 Tortonese 시장은 밀라노에 가깝기 때문에 밀라노 주민들은 주로 이곳에서 와인을 구입했었다. 참고로 1782년 밀라노 전 인구가 130,000 헥토리토의 와인을 마셨는데 모두 피에몬테산 와인이었다.


이런, 엄청난 와인 소비 배후에는 원산지 가격이 저렴해야 하는 전제조건이 깔렸었다. 즉, 원가에 수송비, 국경세가 붙는 걸 가만하더라도 시장에서 소비자가 살 때는 선뜻 주머니를 열 만큼 부담 없는 가격이어야 했다. 또한, 대량의 와인을 공급하기 위해서는 꾸준한 생산량이 뒷받침되어야 하는데 바르베라는 이런 기본 조건을 만족시키는 와인이었다. 이러한 바르베라의 실용성과 유연성은 훗날 중, 하급 와인으로 오인받는데 한 몫 한다.


1819년 필립포 아시나리(Filippo Asinari) 후작의 기발한 발상은 바르베라 와인이 도약하는 기반을 마련하는데,후작은 바르베라 와인은 보존이 어렵고 장기숙성력이 떨어진다는 선입견을 깨기로 한다. 다름 아니라 자신의 영지인 카스티리오산마르자노에서 생산된 바르베라 와인과 네비올로 와인을 담은 대형 오크통을 브라질의 리오데자 네이로까지 배로 수송하는 계획이었다.


          


두 달에 걸린 항해 후 목적지에 도달한 바르베라 와인을 맛본 사람들은 "바르베라 와인의 상태는 완벽하며, 숙성이 제대로 되어 맛이 최상이다"라고 했다. 바르베라 와인이 유럽 반대쪽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던 비결은 프랑스에서 도입한 양조기술이 뒷받침된 품질상승에 있다.


바르베라의 성공은 피에몬테 와인 생산자들을 고무시켰으며 바르베라 와인 전성기의 서막을 열었다. 55명의 사업가가 모여 와인 수출 회사를 차려 그 당시의 화폐로 1만 리라의 수입을 거두었으며 그간 보르도 와인이 영국 와인 시장을 독점하고 있었는데 바르베라 와인이 틈새를 뚫고 영국에 진출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1844년, 코스티리올레 다스티(Costigliole d'Asti) 시에 Laghenoteca가 설립되는데, 세계최초의 와인 도서관(Biblioteca delle Bottiglie)이라 할 수 있다. 이곳에는 2500여 병의 피에몬테주 와인이 서가처럼 전시돼있었는데 그중 50%는 바르베라 와인이 차지하고 있었다. 각 와인은 개별 코드가 부여되었고 그 코드의 위치를 알면 해당 와인의 역사, 품종, 양조방법 등이 적힌 와인 카드에 접근할 수 있었다. Laghenoteca는 회원들한테만 개방되었고 회원이 와인을 시음하면 소감을 와인카드에 기록할 수 있게 했다.


1880년대에 진입하면서 바르베라의 전성기는 주춤하게 된다. 생산자들의 경쟁적 생산으로 인해 프랑스 세관과 수입세 마찰이 일어난다.또한, 저렴한 가격의 남부 이탈리아 와인이 대량으로 쏟아지기 시작하자 이에 맞대응하기 위해 바르베라 와인 생산자들은 경쟁적으로 가격을 내리기 시작한다. 이후 몇 년 지나지 않아 바르베라의 가격은  30% 폭락했으며 여기에서 오는 손실을 보충하기 위해 남이탈리아의 레드와인을 사다가 섞어 파는 등 품질은 날로 악화하였다. 이후 필록세라 전염병의 파동과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바르베라의 암흑시대가 온다.


1960년대 일부 와인계 저명인사(Arturo Bersano,Paolo Monelli, Renato Ratti, Mario Soldati, Luigi Veronelli)들은 바르베라가 사람들의 입맛과 시장의 요구에 맞게 재단된 통속적인 와인에서 탈피해 자라난 자연환경을 담아내는 테루아 기반 와인으로 복귀해야 함을 주장한다.


바르베라 와인에 대한 평범함과 편견은1980년대 Braida 와이너리의 창립자인 자코모 볼로냐에 의해서 어느 정도 벗어나는데 당시 고급와인 숙성의 트레이드 마크로 인식되던 프랑스제 배럴(225리터)을 바르베라 와인 숙성에 도입하면서부터다.


자코모의 노력은 전반적으로 바르베라 와인의 품질을 높이는데 기여를 했으며 현재 바르베라의 전통적인 주요산지(아스티와 몽페라토 지역)에서 생산되는 세 종류의 바르베라 와인이 DOCG등급(Barbera d'Asti, Nizza, Barbera del Monferrato Superiore)으로 등극하는데 공헌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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