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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에는 토종품종만 재배되지 않는다.

블로그 운영자가 쓴 와인칼럼

by 이탈리아 와인로드 2017. 1. 26. 2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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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 비가 섞인 안개를 뒤로 밀어내며 플랫폼으로 기차가 도착한다. 스마트폰을 열어 전자티켓에 써있는 열차번호와 칸이 맞는지 확인한 후 열차에 올랐다. 밀라노 중앙역을 느릿느릿 빠져나온 레조날 기차(무궁화호 급)가 속도를 내기 시작할때쯤 스피커에서는 40분 더가면 베르가모에 도착할거라는 안내방송이 나온다. 차창 밖의 짙은 안개속에 뿌옇게 드러나는 식물들의 음영은 음침하고 습기찬 지중해 겨울을 예고하고 있었다.


두 달 전 "에모지오네 달 몬도:Emozioni dal Mondo: Merlot e Cabernet"와인 품평회 초대장을 받았을때 기쁨과 동시에 베르가모에서 이런 행사가 열리는것에 문득 의문을 품었던 적이있다. 토착품종의 산실인 이탈리아에서 그것도 메를롯과 카베르넷 계열로 만든 와인의 우열을 가리는 와인품평회가 열린다니 의외라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의구심은 곧 이탈리아 와인에 길들여진 나의 입맛을 깨우고 외래품종으로 만든 이탈리아 와인의 현주소를 알고 싶은 궁금증으로 바뀌였다.


베르가모는 중세때 쌓은 성벽이 옛도심을 포근히 감싸안고 있으며 이탈리아에서는 성곽이 잘 보존된 몇 않되는 도시이다. 성곽안에 있는 도시는 '치타 알타(Citta' Alta)'라 하며 인구가 늘어나자 이를 수용하기 위해 지어진 '치타 바싸(Citta' Bassa)'를 내려다 보고 있다. 치타 알타의 관문인 성문들은 지어질 당시의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고 베네치아 공국의 수호동물인 사자상 음각이 새겨진 자코모문(Porta San Giacomo)은 베르가모에서 만나는 뜻밖의 베네치아다. 쟈코모문에서 그 반대편에 서있는 알렛산드로(Porta San'tAlessandro)문까지 나있는 콜레오니(Via Bartolomeo Colleoni)길은 바로크풍으로 한 껏 멋을낸 건물들이 드리워져 있다.


'에모지오네 달 몬도'품평회는 올 해 12회를 맞이하며 카베르네 소비뇽, 카베르네 프랑, 메를롯 품종으로 만든 와인만 심사한다는 점에서 일반 와인 품평회와는 다르다. 발칼레피오 와인콘소시엄의 디렉터이자 양조가인 '세르조 칸토니Sergio Cantoni'씨가 메를롯과 카베르넷 품종을 확산,보급시키기 위해 시작했으며 '베르가모 포도재배자 연합회Vignaioli Bergamaschi S.C.A'와  '발칼레피오 와인 컨소시움Cosorzio Tutela Valcalepio'이 본 품평회 진행및 경제지원을 담당한다. 올 해는 236종의 와인이 베르가모로 보내졌고 27여개국에서 온 83명의 심사원들이 우열을 가렸다.


아틸리아 농림부의 인가와 OIV(국제와인 기구)감독하에 진행된 본 품평회에서는 금메달, 와인미디어 상(Premio Della Stampa), 웹어워드 (Web Award)를 각각 가려냈다. 금메달을 받게된 와인은 71종으로 이탈리아,크로아티아,이스라엘,아르헨티나,러시아,중국,터키,헝가리,슬로베니아,세르비아,독일,체코,남아공화국의 와인에 돌아갔다. 세 품종의 종주국인 프랑스와인은 금메달 리스트에 오르지 못했고 중국과 러시아 와인이 다 수를 수상해 심사원들의 놀라움을 샀다.





금상받은 와인의 약 50%(38종)는 이탈리아 와인에 돌아갔는데 금메달을 수상한 와인의 산지를 보면 5종만 제외하고 북이탈리아에서 생산된점이 흥미롭다. 또한,메달을 받은 와인은 거의 와인등급에 올라있는데 40여년전만해도 프랑스품종으로 만든 와인은 이탈리아 정부가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리 품질이 우수해도 테이블와인으로 밖에 취급 받지 못했던 때를 생각하면 격세지감이 든다.현재 이탈리아에서 등급와인은 모두 522(DOCG등급:74개, DOC등급:330개, IGT등급:118개)여 종류로 프랑스 품종으로 만든 와인으로 등급을 갖고 있는 와인은 약 68여 종류다. 여기서 잠시 이탈리아내 프랑스품종 와인의 현주소를 알아보자.


이탈리아에서 와인용 포도는 총 63만 헥타르에서 재배되는데 그중 메를롯은 2만3천 631헥타르, 카베르네 소비뇽은 1만 3천 258헥타르, 카베르네 프랑이 6천여 헥타르를 차지한다. 프랑스산 세 품종이 차지하는 면적은 총 4만 3천 헥타르이며 토착품종으로 가장 넓은 지역에서 재배되고 있는 산조베제의 5만3천 865헥타르의 면적과 비교할때 이 외래품종이 이탈리아 경작지에서 차지하는 중요도는 높다. 또한, 한국인에게 잘 알려진 몬테풀차노와 네로다볼라 품종의 재배면적의 합(4만 3천 900헥타르)과 비슷해 이탈리아에서는 토종품종만 재배될거라는 생각은 여지없이 무너진다.




이탈리아에서는 세 종류의 프랑스 품종을 블랜딩한 와인을 '탈리오 보르돌레제Taglio Bordolese'라고 하는데 직역하면 보르도식 블랜딩 이다. Taglio(탈리오=블랜딩)는 이탈리아 농부들이 오랜 옛날부터 해오던 양조방식중 하나로 와인의 맛을 부드럽게 한다든가 좋지 않은 향을 줄이기 위해 장소가 다른 밭에서 수확한 다양한 수령의 포도를 섞어 발효시킨 것을 뜻한다.


보르도식 블랜딩은 이젠 너무 흔한 양조방식이 되버렸지만 이 블랜딩을 시도하여 상업화시킨 곳은 토스카나주이다. 수퍼투스칸으로 더 친숙한 이 와인은 이탈리아어를 모르는 와인애호가라도 사씨까이아,티냐넬로,오르넬라이아,솔라이아,마세토 단어쯤은 입에서 술술나올 만큼 국제어가 되었다. 역설적이지만 이탈리아식 보르도 스타일 와인을 국제명품으로 올려논 수퍼투스칸의 주역들은 적어도 8백년전부터 토스타나 와인의 명맥을 이어온 토착 명문귀족들이다.


수퍼투스칸와인이 이탈리아의 아이콘 와인인건 분명하지만 엄격하게 이탈리아 와인은 아니란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이탈리아 토양에서 자란 보르도 품종을 세계인의 입맛에 각색한 수퍼투스칸 보다는 이탈리안 토양과 기후를 담아낸 와인이 더 이탈리아 와인답다고 생각된다.


이런점에서 '에모지오네 달 몬도'에서 수상한 와인들은 산미가 높고 덜 다듬어진 타닌이 입안에서 걷돌기도 하지만 싱그러운 과일향이 놀랍도록 순수하다. 또한, 나무 숙성재료도 밤나무,아카시아,체리나무등 주위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를 사용해 오크통만 고집하지 않는다. 개별 생산자의 노하우와 손 맛이 스며있는 거침없는 카베르네 와인을 마시면서 우리의 오감은 자유롭게 반응한다.




이탈리아 와인생산자들이 프랑스품종에 갖고 있는 불편함은 아마도 안젤로 가야씨와 다마지와인 탄생일화에서 들어난다. 안젤로 가야씨가 카베르네 소비뇽을 심기위해 부친이 잠깐 집을 비운사이에 네비올로 뿌리를 뽑아냈는데 집에 돌아온 부친이 이걸 보고 "다마지(피에몬테 방언으로 맙소사의 뜻)"라고 외쳤던 그 일화는 너무나 유명하다. 이 일화는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의 이야기가 되었고 가야를 이단아라고 부르던 피에몬테 동료들은 랑게 언덕에 카베르네 소비뇽,메를롯은 물론 소비뇽블랑,샤르도네 포도에 내주고 있다.


이탈리아 에노테카(와인샵)에서는 피노누아나 샤르도네로 만든 스푸만테가 베르멘티노,베르디끼오,가르가네가 등의 토착품종으로 만든 스푸만테보다 더 인기있고 비싼 가격에 팔리고 있다. 2011년 프랑스 세 품종이 주가되는 몇 종류의 와인이 docg등급(예: Suvereto,Val di Cornia Rosso,Colli di Conegliano와인)으로 지정되어 토착품종 일색의 등급보수주의 마지노선이 무너졌다. 이런 추이를 보면서 카베르넷과 메를롯이 토종품종보다 재배하기 쉽다는 이유로 또는 이 품종으로 만든 와인에 익숙한 고객층이 두텁기 때문에 영업이 수월하다는 핑계로 양지바른 언덕을 양보하는 일이 없길 바랄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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